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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며칠간 봉사활동을 빙자한 감시를 다녀본 결과, 유현은 신입이 말한 나비효과에 대해서는 썩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이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하루종일 거의 앉아만 있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창 때의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법이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빨래와 청소 등을 하다보면 아이가 창가를 보며 시무룩해 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유현은 그것이 신경에 거슬리면서도, 자신이 내심 안도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대체 무엇에 대해 안도한단 말인가? 예림을 볼 날을 하루 늘릴 수 있다는 것에? 하지만... 아이를 죽이는 즉시 '진짜' 예림이 돌아올텐데.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각성한 후 거의 느껴본 적 없는 지끈거리는 두통도 마찬가지였다. 유현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어쩔 수 없어. 완벽한 기회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 동상에라도 걸린 것처럼 둔탁한 고통이 지속되는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태양은 매일 더욱 높이 솟아올라 여름을 향해 가는데, 유현은 이상하게도 날이 하나도 따뜻하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겨울의 세계에서만 살다가 어느 날 남반구의 햇살을 받았는데 그걸 도로 빼앗긴 것처럼 당황스럽고 쓸쓸하다. 누군가를 지키는 삶이란 원래 위태롭고 초조하고 혼자 버텨내야 하는 것인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위로를 건내는 순간에서야 사실 혼자 지키는 것이 외로웠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고 나서야 지고 있던 책임이 때로는 힘겨웠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손 끝이 무감각하고 저릿한 아픔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님을, 잡아주는 온기가 따뜻하고 안도됨을, 그래서 나는 그제서야 하루의 무게를 덜어내고 편안해져 하루하루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잡아주던 작은 손도 온기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유현은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이 ‘원래’ 그런 힘겨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려서.

 

  매번 집으로 도착하는 즉시 유현은 꿈으로 도피했다. 춥지 않은 곳, 잡아줄 손이 있는 곳으로.

 

 

*

 

 

  어쨌거나 예림과의 연애는 유현이 평범함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아주 평범한 연애. 남들의 눈을 피해 회의실 탁자 아래로 몰래몰래 잡아보는 손이며, 길드장실에서 간략한 보고가 끝난 후 얼른 맞춰보는 볼뽀뽀 같은 것 말이다. 인식방해안경을 써야 하는것만 제외하면 남들과 다를 것 하나 없었던 휴일의 데이트. 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사람들을 헤치며 홍대의 거리를 거니는 일이며, 다소 어설프지만 열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관람하며 소극장 한 구석에 앉아있는 것, 어두운 극장에서 빠져나와 햇살 아래로 나오면 가로수 그늘이 어룽지는 연인의 얼굴과 민트초코맛이 났던 첫키스.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한강 둔치는 몇 번이나 더 갔다. 길고 긴 줄을 서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던 네모난 호일그릇에 담긴 라면과, 속력을 낸다던가 하는 기능적 측면에서는 썩 적절치 못한, 하지만 연인 느낌만큼은 물씬 났던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마포대교를 보는 것. 돌아오는 길 편의점으로 달려가 캔을 따주었더니 와구와구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던 얼룩무늬 길고양이. 그 해 여름의 기억은 행복으로 덧칠한 것처럼 흘러갔다. 유현은 흘러가는 꿈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반항하지 않았다. 종종 봉사를 명목으로 아이를 찾아가고 길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들만 처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고 꿈을 꾸는데 보냈다. 현실이 꿈이고 꿈 속이 현실인 것처럼. 일 년 전 온 몸을 채웠던 행복스러운 안정감이 다시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예림과 함께할 때에 유현은 늘 터질듯 억눌리는 태스급 특유의 파괴본능이나 호전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설사 본능이 앞서 훼까닥 도는 일이 있더라도 예림은 다치거나 놀라서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물이나 한 저수지 뿌려주면서 정신차리라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누군가가 함께함으로써 스스로가 안전해진다고 느끼는 안정감.

 

  그 날 꿈의 시작은, 유현은 침대 끄트머리에 떨어질 듯 걸쳐져 자고 있는 예림이었다. 유현은 나른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끔뻑이며 예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깨 언저리에 유현의 손이 닿자, 예림의 몸이 곧 데구르르 굴러와 제 자리라는 듯 품에 쏙 안긴다. 마찬가지로 잠이 듬뿍 묻은 눈을 들어올리며 품 속에서 헤실헤실 웃었다.

 

  "몇 시야?"

  "열한시. 더 잘래?"

  "아니.."

 

  반쯤 감겨있던 눈이 금세 뜨여 반짝인다. 유현이 통통한 볼을 쭉 잡아당겼다.

 

  "오늘 36도라던데. 꼭 나가야겠어? 더위도 약하면서."

  "아깝잖아. 휴일에 집에 있는 거."

  "난 이대로 계속 있는 것도 좋은데."

 

  슬쩍 들어온 손이 예림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예림이 깔깔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놓아주지 않자 유현의 목을 간지럽히는 것으로 반격한다. 유현이 킥킥거리며 예림을 안고 침대에서 몇 바퀴 뒹굴거렸다. 들어차는 작은 몸이 말랑하고 따뜻하다. 침대 끄트머리까지 가서 떨어지려는 순간,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날다람쥐처럼 바닥에 챡 내려선 예림이 선언했다.

 

  "나 먼저 씻는다!"

 

  행여나 마음을 바꿀라 부리나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유현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름이면 한강 공원은 바닥에 홈을 파놓고 물을 채웠다. 예림은 유현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솟아나오는 분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한여름 오후에 가족과 나온 아이들이나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이 꺄륵거리며 물을 튀기고 있다. 예림이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만큼, 하지만 유현에게 보일 만큼은 뻔하게 물방울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기우는 햇살 끝에 작은 물방울들이 코 끝에서 터져나갔다.

 

 

  "..하여간 별나."

  "또 뭐가?"

 

  얍, 하고 예림이 물 몇 방울을 튀겼다. 유현이 손만 들어 가볍게 막아냈다.

 

  "여름 좋아하는 게. 더위도 잘 타는데다, 속성이 명확할수록 보통은 자기 속성에 가까운 것들에 마음이 가니까."

  "뭐, 겨울도 나름대로 좋아."

 

  길거리 호떡이나 붕어빵 같은거. 하얀 눈도 좋고. 예림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도 여름엔 방학이 있잖아. 어렸을 때는 아빠가 휴가내면 며칠씩은 꼭 같이 바다로 놀러갔거든."

  "동해안?"

  "응, 모래사장에 텐트 쳐놓고, 엄마가 선크림 발라주는 새를 못 참고 얼른 바다로 뛰어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그랬어.    놀다가 배고파서 들어오면 버너에 라면 끓여먹고."

  "좋았겠네."

  "좋았지. 물놀이하다 먹으면 음식이 몇 배쯤 더 맛있게 느껴지잖아. 거실 바닥에 대나무 돗자리 깔아두면 엎드려서 방학숙제 하던 것도 기억나. 그런 기억들이 있어서 좋은듯?"

 

  유현의 표정이 겨우 그런걸로? 라고 묻는 것 같다. 예림이 웃었다.

 

  "야, 너랑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제일 이상해. 원래 싫었던 것들이라도, 좋은 경험들이 있으면 좋아질 수도 있지. 사람이 본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너는 뭐 좋아하는 거 없어? 맨날 내가 가자는데만 가는 것 같은데."

  "글쎄, 특별히."

  "식당 가도 맨날 그 소리잖아."

 

  자꾸 그런 식이면 진짜 마음대로 해버린다. 다음 데이트는 명우오빠네 대장간? 불속성이니까 용광로 들어가 계실래요? 물이 가득한 풀장을 뒤로 하고 예림이 발을 장난스레 까닥거리며 웃었다. 유현이 답해주듯 다정하게 웃으며 예림의 손을 잡아줄 듯 다가오더니, 어깨를 살짝 밀어낸다. 어 어 어? 하며 허둥거리던 예림이 중심을 잃고 뒤로 휙 넘어갔다. 아이들이 놀고 있던 분수대 겸 풀장은 어른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깊이였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성인 여성이 쫄딱 젖는데는 충분했다.

 

  "야악!!!"

  "물 속은 기분 좋아?"

  "좋겠냐?! 죽여버린다 한유ㅎ..."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예림이 입을 다물었다. 유현이 주저앉은 예림에게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더 놀렸다간 감당하기 힘든 복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잔뜩 흔들어 놓은 맥주도 아니고 멀쩡한 물병의 뚜껑을 열었는데 물이 얼굴로 역류한다던지, 머리에 거품까지 내고 헹구려는데 샤워기에서 물이 아니라 우박이 후두둑 떨어지는 일이라던지. 가장 심했던 것은 호칭이 '길드장님'으로 바뀌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더니 일주일간 유현은 본체만체한 채 유진과 문현아, 강소영 등과만 어울렸던 일이었다. 다시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유현이 얌전히 합의안을 건냈다.

 

  "또 다른 사람 있는데로 데이트 간다는 말 안하면,"

  "하?"

  "저쪽에 사람들 안보이는데서 능력 써서 옷 말려줄게."

  "..."

  "..이따 저녁 계란 완숙프라이."

  "..."

  "...집까지 업어줄게."

  "콜."

 

  예림이 유현의 손을 잡는 대신 폴짝 뛰어서 등에 매달렸다. 가볍게 들춰업은 유현이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은 한여름의 열기를 상쇄하는데 충분치는 않았지만, 땀 흘린 후 마시는 물처럼 달았다. 달랑거리는 발 아래로는 붉은 자갈들이 깔린 예쁜 오솔길이 지나가고 머리 위로는 짙푸른 녹음과 두툼한 구름들이 섞여 흘러간다. 유현의 등 뒤에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손장난을 치던 예림이 문득 물었다.

  "그럼 다음엔 어디가 좋은데? 뭐, 장소가 떠오르지 않으면 하고싶은 거라도."

  "..또 물에 빠트리는 건,"

  손가락에서 부드럽게 엉키던 머리카락이 휙 끌려 올라갔다. S급은 머리카락도 S급이라는 농담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미용가위나 비각성자 대상의 이야기다. 탈모 오기 싫으면 제대로 대답하라는듯 예림이 연인의 머리카락을 위협적으로 휘감았다.

 

  "농담하지 말고."

  "좋아하는 거 말해보라며."

  "이런게 좋냐? 좋아? 유치해 진짜."

  "거짓말 아닌데."

  유현이 소리내어 웃자 예림이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옷 너머로 입을 삐죽이는 감각이 느껴져 다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유현은 처음으로 마음 속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셈해 보았다. 필요하거나 없으면 안되어서 곁에 두었던 것들이 아니라, 정말로 좋아졌거나, 거슬렸지만 나쁘지 않게 된 것들. 친밀함이 바탕이 된 장난. 싫지 않았던 한강의 습기찬 밤바람. 퍽퍽한 완숙 노른자. 짜고 맵고 자극적이던 온갖 인스턴트 음식들.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홍대의 거리. 얼룩무늬 길고양이.

  예림과 함께해서 좋았지만, 이젠 예림 없이 혼자 마주쳐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유현은 좋아하는 것들이 생긴다면, 그건 경험과 의미가 덧붙여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평면적이던 일상의 일부에 색깔과 감정이 깃드는 과정. 타인의 존재도 예전처럼 못견디게 힘들지 않았다. 관심 없는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희미하던 길드원들 몇몇의 얼굴이 배역을 얻은 듯 또렷해진다. 주로 예림의 팀원이거나 예림과 관련해 말을 섞은 적 있던 이들이었다. 타 길드라는 감각밖에 없던 문현아나 강소영도, 예림과 친밀하다니 예전처럼 날을 세우지는 않게 된다. 그렇게 제 세계에 색을 덧입히는 일들은 한 번 시작되면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설사 그 붓을 쥐고 칠하기 시작한 사람이 예림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유현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유현은 익숙하게 기억에 남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예림과 자주 가던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

 

 

  이제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와중에도 유현은 종종 고아원을 찾아갔다. 곁눈으로나마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유현의 현실이 여기라는 것을 자각하는 유일한 줄이었다. 예림의 목숨을 대가로 삶을 이어가는 생명.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아이가 우물거리며 밥을 먹고,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살아서 숨을 쉬느라 작은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는 일 자체가 예림의 부재를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다만 유현이 아이를 마주치는 일은 의외로 적었는데, 첫 번째로는 아이의 부상이 경미해 아이가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두 번째는 유현이 꿈에 반쯤 넋이 나가 배정되는 일들에 거의 토를 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직원은 처음엔 총명해 보이더니 갈수록 표정이 멍해지는 청년에게 때때로 걱정과 염려가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웬만한 경력자들 세 사람 몫을 하며 빨래를 척척 개고 배식판을 나르는 인력에게 굳이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유현이 아이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여름이 다 지나갈 즈음에서였다. 물론 꿈에서의 기준으로. 현실의 계절은 이제 겨우 6월 초입에 들어섰기 때문에, 아이는 하늘색 셔츠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황토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부받은 책을 정리해서 책장에 꽂아넣고 있던 유현이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아이는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유현은 책을 들어올리던 그대로 굳었다. 벽에 걸려있던 초상화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유현은 그동안 아이에 대한 관찰이 녹화된 화면을 보는 정도의 감각이었음을, 자신이 한번도 아이가 '진짜로' 말을 하거나 숨을 쉴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격렬한 증오나 분노를 느낀 적 없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저 애는, 예림이 죽을 때의, 핏자국, 그러니까 예림이 대신, 꺾여진 팔다리, 아니, 힘없이 떨어지던 손, 꺼지던 동공, 예림이, 날아가던... 귓가에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리고 갑작스런 헛구역질이 올라오기 전, 다행히도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키더니 먼저 용건을 알려왔다.

 

  "도와주세요."

  "..뭘?"

  "고양이가 끼었어요.."

 

  유현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 1층 창문 아래에는 건물과 건물이 맞닿은 틈이 있었다. 그 사이에 고양이 한 마리가 끼어서 울고 있었는데, 꼬질꼬질한 털이며 눈 밑에 눈물이 말라붙은 것이 며칠은 그곳에 있었던 듯한 모양새였다. 틈새가 너무 좁아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원장님한테 물어보니까, 꺼내려면 벽을 뜯어내야 한다고, 무리라고 해서..."

 

  틈새로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물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배고플까봐 아이가 넣어주었다고 했다. 1층 창문을 휙 넘어가는 유현을 아이가 절뚝이며 따라왔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헉, 아저씨 고양이 구하게요? 직원 누나가 형이랬어! 근데 아저씨 손은 커서 안들어갈 것 같은데, 따위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주위를 둘러싼다. 유현은 한숨을 쉬며 틈새를 가늠해 보았다. 원장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꺼낼수야 있겠지만, 시멘트로 고정된 벽돌 몇 개를 부수어야 하니 인부를 불러야 하는 수준이다.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고 다친 사람들을 구조할 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고양이를 구하자고 사람을 불러올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음소리를 낼 힘도 다했는지 힘없이 야옹거리는 고양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벽에 끼인 채로 죽어서 시체도 수거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유현은 공구함에서 망치며 끌 같은 것을 대충 꺼내들었다. 삼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을 뺄 수 있는 틈이 생기자마자 고양이가 번개같은 속도로 튀어나왔다. 사방을 둘러싼 인간들을 보고 온 몸을 부풀리며 하악거리더니 아이에게로 뛰어든다. 난데없이 고양이를 안아든 아이가 놀라서 얼어붙었다. 고양이는 제가 탈출로를 잘못 택했음을 알았는지 금세 품에서 뛰쳐나와 내려서더니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유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제서야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언뜻 지나간다. 고양이가 살아난 것이 신입이 말한 '미미한 오차'에 해당이 될까? 그게 안된다면 아이를 처리할 때 고양이까지도 함께 처리해야 했다. 제가 살려낸 것을 다시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지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원래 고양이란 것들은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 마련이다. 예림과 종종 밥을 챙겨줬던 그 고양이도... 유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고양이를 같게 여기고 있었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러느라 중요한, 이 고아원에 와 있는 아주 기본적인 까닭도 잊은 것이다.

 

  고양이를 구하는 동안 잠시 잊었던 두통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다시 스멀스멀 퍼져온다. 유현은 지금은 그 고양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투 중에 서울 땅이 갈아엎어지다시피 했으니 높은 확률로 죽었거나, 살았더라도 진작에 영역을 옮겼을 것이다. 예림과 함께 밥을 주던 추억이 그리웠다면 그 고양이나 찾아서 챙겨주면 될 것을, 같지 않은 것을 같게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든 것 같았다. 여태껏 아이를 죽이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고양이 한 마리를 살려보낸 것도 그렇고, 분명 연고없는 고아 하나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는데, 아주 쉬운 일이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머릿속에서 나사들이 삐걱이며 튀어나와 뇌를 찔러대고 있는 것 같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려 퍼진다.

 

  아이들이 뭐가 그리 신나는지 환호성을 지른다. 유현에게 처음 부탁한 아이가 수줍음이 한 겹 벗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뭐..."

 

  유현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 간신히 웃는 표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나봐."

  "아,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럼 왜 이딴 부탁을 한거야? 유현은 아이의 어깨를 잡아 쥐고 흔들지 않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일곱살 아이의 어깨 정도는 쉽게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릴 것이다. 그런 속은 알아채지 못하는지, 아이가 말을 이었다.

 

  "좀, 무섭게 생겼구..."

  "..."

  "근데 밥 주다가 정이 들어서요."

 

  아까 저한테 안긴 것 보셨어요?! 안겼다기보다는 뛰어든 모양새에 가까웠지만, 아이는 흥분해서 약간 목소리가 높아졌다. 약간 냄새가 났다던가, 털이 꼬질하지만 부드러웠다던가 하는 감상을 늘어놓던 아이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처음엔 싫었어도 변해서 좋아질 수도 있나봐요. 밥 주는동안 친해져서,"

 

  아이가 시선의 옆쪽이 갑자기 휑해졌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린다. 유현은 몇 걸음 뒤에 서서 미소도 짓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목구멍에서 뭔가 비집고 올라와 터져나오려는 것을 주먹을 말아쥐고 간신히 참아낸다. 아이는 약간 놀랐다. 고양이를 구해준 친절한 봉사자의 얼굴이 딴 사람처럼 이질적이었다. 꼭, 노란 눈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는 고양이를 볼 때처럼... 아니, 그보다도 훨씬 겁이 났다. 그래도 아이는 본능적으로 이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아이는 본능이 알리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들이 때로 다를 수도 있음을 알았다. 더이상 고양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듯이. 아이는 봉사자가 벽을 뜯어내느라 고생해서 몸이 아픈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서움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원장님 불러다 드릴까요?"

 

  유현은 아이의 새끼손톱에 작은 네일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초등학생 애들이 가지고 노는 그 스티커는 분홍색 꽃 모양으로 전혀 닮은 점이 없었지만 유현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이가 면면도 희미하던 엑스트라가 아니라 얼굴과 표정을 가진 사람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전혀 같지 않은 일이었는데. 유현은 중얼거렸다. 전혀 같지 않은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상대와 같지 않은 경험에 공감하는 일이, 연상하여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

 

  유현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도망쳤다. 건물을 나와서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미친듯이 아팠다.

 

  유현은 아이를 더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꿈이 꿈임을 깨닫는 순간 깨어나고야 마는 것처럼, 현실의 인물을 현실로 인지한 순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냥 꿈에 기대어 미루던 시간은 깨어졌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6.

 

  자다 깨고, 뒤척이고, 짧은 꿈을 꾸다가, 다시 깨는 일이 반복된다. 꿈은 필름이 끊어진 영화처럼 뚝뚝 끊어져 유현은 깨어날 때마다 영화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등장인물처럼 허우적댔다. 잠은 길게 자는 법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가끔은 귀걸이가 보여주는 기억이 아니라 진짜 꿈도 꿨다. 주로 예림이 죽는 날의 꿈이었다. 본능 같은 예감에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를 내어 도착했을 때, 보이는 몬스터를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으로 죽이고 근처에 있던 예림의 팀원이 그제서야 고통 어린 통곡을 내었음에도, 유현은 그 순간까지 예림이 불편하게 왜 저기서 자고 있지, 라고 생각했다. 무너진 철근과 콘크리트 자재를 베개 삼고 하늘거리는 숄을 이불처럼 덮고서. 예림은 원래 어디서나 잘 잤다. 유현의 팔이 단단해서 베개로는 영 못 쓰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걸 베면 금세 곯아 떨어졌다. 그러니 피곤해서 잠깐 잠들었을수도 있다. 유현은 예림의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고 머리를 기댄 벽에는 핏자국이 흥건한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예림이 죽는 순간을 눈 앞에서 직접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총기 넘치던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하얀 피부 아래 팔딱이던 작은 심장이 꿰뚫리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아직 미처 식지 못한 채 뜨뜻하게 흐르는 피에는 온기가 남아있어서, 그도저도 아니면 눈을 감은 예림의 얼굴이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안해서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이 아직 끝장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이상하지. 예림이 죽었는데 어디선가 몬스터는 또 튀어나왔고 고통스레 울던 예림의 팀원은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다시 싸우고 있었고 예림이 구한 아이는 발발 떨면서 바닥을 기고 있었고 유현은 숨을 참거나 자신의 목에 칼을 꽂아넣는대신 살아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유현의 세계가 끝장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예림은 죽은 것이 아닐 것이었다. 그 후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나고 신입의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안도감만 선명했다. 아, 모든 것을 돌릴 수 있다. 예림은 '원래' 살아야 하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세계가 끝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현이 지금까지 숨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현은 예림을 사랑했으니까. 자신의 모든 세계를 하나에게 쥐어주고 그게 파괴되면 함께 끝장나는 것이 유현이 아는 유일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성립하지 않았음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라면 오로지 예림이 '진짜'로 죽지 않았거나, '원래'라면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밖에 없었다. 유현이 예림을 사랑하지 않았을리는 없었으니까. 유현은 예림을 살릴 수 있음에 기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느꼈던 참담한 실망감과 배신감도 기억했다. 그 얼어붙은 면면들.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기 전 꿈이 까무룩 넘어갔다.

 

  슬슬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10월 초입이었다. 여름에 푸릇하던 가로수의 은행잎 끝자락이 햇볕에 익어 노릇노릇해졌다. 유현은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가로수 아래에 서서 예림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현은 이 날을 기억했다. 함께 했던 모든 날 중 기억나지 않는 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드물게도 다툼이 있었던 날이라서였다. 평소와 같은 투닥거림이 아니라 정말로 심각하게 말을 주고받은 싸움이었다. 평소의 활기참과는 대조적으로 예림은 화가 나거나 집중할 때면 극도로 냉정하고 차분해지는 면이 있었다. 그럴때면 유현은 예림의 부가 속성이 냉기였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유현은 이 날 싸운 이유도 물론 기억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문현아와 강소영, 박예림이 앉아 있었다. 뭐가 그렇게 열심인지 한참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꺄르륵 웃는다. 유현은 문현아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으며 예림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문현아에게 뭐라뭐라 진지하게 핀잔을 주는 소영도 보였다. 예림이 행복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내는 것도 보았다.

 

  분노가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유현은 지금껏 의식적으로 꿈 속의 자신에게 맞추어 행동했다. 빙의하는 것처럼 꿈 속의 몸에 영혼을 겹쳐 행동하면 감각도 느껴지고 기억대로 말도 절로 나왔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에 올라탄 것처럼. 어차피 꿈에서는 예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괜히 엉뚱한 짓을 해서 기억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기억일 뿐임을 알면서도, 유현은 당장 예림을 끌고 나오고 싶었다. 환하게 웃는 예림은 팔 개월 뒤 자신이 죽게 되리란 것을 알까. 지금 같이 앉아 웃고 떠드는 이들이 제 소생을 반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까. 지금 저렇게 아낀다는 표정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고 즐겁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예림이 아니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우선시했다는 것을.

 

  딸랑,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예림이 카페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유현을 보고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얘기 좀 해."

  "알아. 그러려고 만난거잖아. 도망갈 듯 굴지 마."

 

  예림이 딱딱거렸다. 유현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것 뿐이라고 변명하려다 그만두었다. 예림의 이전 약속장소를 미리 알고와서 기다렸다는 점에서 이미 진실성이 없다. 둘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앞에만 두는 것은 사귀기 전의 여름날과 다름이 없는데도 그렇게나 달랐다. 그 때는 보지 않아도 알기 때문에 마주보지 않았고 이제는 알고 있는 것을 외면하기 위해 마주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던 예림이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 방금 수락했어."

  "...기어이."

  "기어이? 너하고 의논해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해?"

 

  예림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렸다. 마주본 눈동자가 얼어붙은 것처럼 냉랭했다.

 

  "해연에서 규정한 업무시간 외에만 활동하니 업무에 지장이 갈 일도 없고, 따로 수입을 내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문제가 없지. 김하연 법무팀장님께도 이미 확인 받았어. 당연히 길드장으로서 문제삼을 건 없을거고, 연인이 이런 일까지 일일히 개입하는거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 안 해?"

  "무보수로 노동하고 가끔 등급 높은 던전에 들어가서 부상의 위협까지 감당하는 일이 말이지."

  "지방에 헌터들이 워낙 부족하니 어쩔 수 없잖아. 대부분 여성헌터들로 이루어진 중소 길드들이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도와."

  "다같이 하기로 한 일이야. 현아 언니가 주축이고, 소영 언니도 틈나는대로 와서 도와주기로 했고."

  "그러니까 굳이 왜 위험한 일을 감당하냐고!"

 

  유현의 목소리가 커지자 예림이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소리 질렀냐? 그나마 한적한 공원에 도착한 것이 주변의 피해를 줄였다. 길거리였으면 흉흉한 기세에 밀려 둘의 전방 백미터 이내로는 행인이라고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유현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휴일에 일하는 게 더 걱정돼. 충분히 쉬지 못하면 다음 공략에 영향 미치는 거 알잖아."

  "거짓말. 처음부터 조건 듣기도 전에 반대했으면서."

  "...그래, 사실 이 일 자체가 이해가 안 돼."

 

  유현이 화를 참듯이 발로 흙을 꾹꾹 눌렀다. 던전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다. 던전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식하는 곰팡이처럼 느리고 꾸준하게 그 수를 불려갔고 난이도도 미세하게 높아졌다. 유진이 시스템에게 문의한 결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답을 얻었다. 멸망을 결정지을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던전의 수가 조금 많아졌다고 해도 대형 길드가 잔뜩 몰려있는 서울은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지방에서 터져나왔다. 원래부터 절대적인 헌터의 수 자체가 부족한 탓에 던전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한 경우까지 버티는 경우가 잦아졌다. 송태원은 성실하고 야근을 마다하지 않는 공무원이었으나 몸이 하나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므로, 그 모든 던전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랭킹전 이후 지방의 중소 길드들이 연합해 관리하고는 있다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정부와 대형길드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각 지방마다 소속 헌터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예림은 지금 그것과도 별개로, 개인 헌터 차원에서 따로 돕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지방의 길드들 중 많은 수가 여성헌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문현아를 주축으로 일종의 연락망이 형성된 모양이었다. 예림이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나 그렇게 위험한 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중소길드는 등급 높은 던전은 경험이 적으니까 훈련 도와주고, 던전 공략은 가끔 정말로 손 부족할 때만 돕겠다는 거야."

  "형이 시스템에게서 부탁받은 게 있어. 따로 계획하는 게 있고 지금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고.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어."

  "알아. 이해했어. 내가 지금 이러는 게 멸망을 막거나 하는데는 별 영향이 없을거란거."

 

  아저씨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챙겼을테니, 우린 살겠지. 소영언니나 세성 길드장이야 강하니 말할 것도 없고. 당연히 명우 오빠나 노아 오빠, 아저씨 주변 사람들도, 아마 사육소 사람들도 높은 확률로 무사할거야. 예림이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럼 그 후엔?"

  "무슨 뜻이야?"

  "나 그렇게 정의로운 사명감만으로 나서는 거 아니야. 지방 길드장들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저번에 길드전에서 만난 후로 밥도 몇 번 먹고, 연락도 주고받고 있어. 그럼 멸망을 막아낸 이후엔. 그 사람들은 살아? 아저씨가 전부 보호해 줄 수 있대?"

  "..."

  "나 아저씨랑 다른 일 하는거 아니야.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챙기려고 이러는거야. 좋은 사람들인데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사람들이 자기 지역에 애착이 있다는 거 뻔히 보이니까 마음이 더 쓰이고, 근데 내가 도와줘서 경험이 쌓이면 똑같이 멸망 막는 과정이라도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는데."

 

  아니야. 유현은 반박하고 싶었다. 기억 속의 자신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예림을 잃은 유현으로 말하고 싶었다. 문현아나 강소영, 유명우조차도 너를 외면했는데 그 사람들에게 그럴 가치가 있어? 겨우 몇 번 만난 것 가지고, 그런 얄팍한 관계가 뭐라고 마음이 쓰인단 말인가.

 

  "현아 언니가 함께하자고 말해줬을 때 나도 기뻤어. 의지 받는 기분이 들어서."

 

  의지?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 유현은 큰 것을 바란적이 없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제 세계 안에 안전하게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만을 바라며 수백개의 던전을 공략하고 거슬리는 타인들과 말을 섞어가며 길드를 세웠는데, 유진은 온갖 위험한 사건들의 중심에 목덜미를 들이밀질 않나, 뒤늦게 들어와서 유현의 세계를 헤집어 놓은 예림은 이젠 정말로 생판 상관없는 남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원하는대로 손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유진의 일도 세계를 구하는데 필요하다고 해서 겨우 납득한 건데. 세계가 멸망하면 유진도 예림도 없으니까. 하지만 예림은...

 

  "그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고 의지해주고, 나도 그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이해해 주면 안돼? 예림이 차분해질수록 유현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 곳에 존재하는 몸이 있고 팔이 있다면 당장 예림을 붙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니야. 그 사람들이 너를 애정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 중에 너의 시간과 노력과 애정을 받을만한 사람은 없다. 네가 죽은 후에 너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은 나 뿐이더라. 너를 정말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 뿐이다...

 

  "그 사람들이 나랑 형보다 중요한가봐."

 

  그러니 너는 그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지도 않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던져서는 안되었다.

 

  유현은 이 다툼의 끝을 알고 있었다. 결국 화해하지만, 이 때 벌어진 이해의 골을 끝내 메우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이것은 유현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예림의 조각들 중에서도 가장 불가해한 것이었으며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었다. 나는 너랑 형만 있으면 돼. 피스도 무사하면 좋고. 유명우나 노아 루히르도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외의 것들은 알 바가 아닌데. 그런데 너는...

 

  "너랑 아저씨가 소중하다고, 그게 내 전부일 수는 없어!"

 

  그래서 그 결과가 이것인가. 너는 죽고 대신 생판 모르는 타인이 네 몫의 삶을 차지하는 일이. 예림의 끝이 병이나, 사고나, 하다못해 자살이었더라도 이렇게 원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예림이 유현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지고 무거워졌는데, 이미 그 일부가 되어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예림의 세계에서 유현은 늘 전부가 아니라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림이 아무리 많은 애정을 보여주어도 그 절대적인 크기와 상관없이 그랬다. 그러니 그렇게 위험하게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 그 순간에 너를 잃을 나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아서. 눈 앞에 선 예림이 흔들린다. 기묘한 바람이 불어와 공원의 나무들을 털어대고 발 밑의 보도블럭이 쩍쩍 갈라지며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네가 그렇듯이."

 

  뭐?

 

  이 날 예림이 이런 말을 했던가? 유현이 굳은 채 고개를 들었다. 이제 예림의 얼굴은 뭉그러진 찰흙처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현은 혼란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변명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걸. 그러니 네가 내 세계의 전부인 것이 마땅하다. 나만이 유일하게 네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 다시 우는지 웃는지 모를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그러면 왜 지금 그러고 있어?

 

  왜 고양이를 풀어줬어? 왜 네일 따위에 마음이 흔들려? 왜 계란 프라이를 완숙으로 해먹고 왜 한강을 지날때면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아? 네 사랑이 단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고 그게 끝나는 순간 네 세계의 의미가 전부 사라지는 거라면, 왜 내가 없이도 그런 것들에서 위안이나 고통을 얻는건데?

 

  지금 뭐,

 

 

  [ ...하고 있는거에요 동생!!! ]

 

  땀에 흠뻑 젖은 귓속으로 새된 고함이 들려왔다. 유현은 눈을 번쩍 떴다. 배경은 자신의 침실이 맞는데, 눈앞에 아이템창이 있는 것처럼 반투명한 창이 떠 있었다. 유치한 이모티콘을 보고 유현이 중얼거렸다.

 

  "..배구공?"

  [ 맞아요! 허니랑 대장장이한테 부탁해서 잠깐 접속했어요! ]

 

  안절부절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글자가 깜빡인다. 유현이 인지했음을 확인했는지 빠르게 다음 글자가 떠올랐다.

 

  [ 작은 물방울을 살리려는 거 아니었어요? 왜 아직까지도 처리가 안된거에요? ]

  "나는, 곧.. 하려고,"

  [ 아이가 밖으로 나왔잖아요! ]

 

  갈겨쓴 것처럼 다급하게 기울어진 글자에, 신입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듯 했다. 유현이 손에 잡히는대로 옷을 집어 걸쳤다.

 

  "무슨 뜻이야?"

  [ 지금까지는 건물 안이나 그 주변에서만 머물렀는데, 지금 사람들 와글와글한 곳으로 나왔다고요! ]

  "..혼자서?"

  [ 아뇨, 다른 아이 둘하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해요! 개방된 공간에서의 불특정 다수의 영향력 제거는 어렵다고요! ]

 

  유현이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폰을 들었다. 신입으로부터 아이의 동선을 확인하고, 차를 대기시킨다. 직접 운전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눈 가운데를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파서 사고를 낼 것 같았다. 오분도 지나지 않아 뒷자석에 걸터앉은 유현이 손을 들어 차를 출발시켰다. 지시에 따라 최고속력을 내는 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7.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꿈일 것이다. 출구 게이트에 앉아 몬스터의 피며 내장이 눌러붙은 창을 닦아내는 예림을 보며 유현은 직감했다. 던전이 점점 더 많이, 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즈음쯤 되면 한 번씩 하던 데이트도 사라지고 간신히 얼굴이나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 던전을 공략한 후 숨만 겨우 돌리고는 바로 다음 던전을 수습하러 떠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번의 만남도 근처에서 유현이 일정이 맞아 간신히 시간을 낸 것이다. 유현을 발견한 예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살이 약간 빠진 볼이 날카롭다.

 

  "밥 잘 챙겨먹으라니까."

  "남말하기는."

  예림이 유현의 얼굴을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퀭해진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유현이 대답하는 대신 예림의 몸을 끌어와 깊이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몇 주만에 보는 연인의 체취며 온기가 안정제처럼 몸에 감겨온다. 살것 같아. 중얼거리는 소리에 예림이 꼼질거리며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네 냄새 난다."

  "...공략 일정이 계속 있어서. 불편하면 저기서 간단히 닦고 올게."

  "아니, 아니."

 

  예림이 웃으며 몸을 떼어내는 유현을 붙들었다. 손깍지를 끼며 못 도망가, 하고 장난스레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런 뜻이 아니라, 네 체취라 좋다고."

  "...나도."

  "아, 예전에는 맨날맨날 맡았는데. 이젠 애인이 너무 바쁘신 몸이 되어서."

 

  던전이 하도 많이 생겨나서 국가는 전시상태나 다름이 없었고, 등급 높은 헌터들로 말하자면 최첨단 병기쯤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길드장인 유현은 더했다. 줄줄이 이어지는 S급 던전 공략에, 길드 내 회의와 길드장간 회의에, 여론을 안심시키기 위한 대외 인터뷰까지. 유현이 깍지 낀 손을 들어올려 손 끝에 정성스레 쪽쪽거렸다.

 

  "길드장 그만둘까?"

  "저기 송태원 관리실장님 이마 짚고 넘어가는 소리 들리는 것 같은데. 이 시국에 해연 길드장의 갑작스런 은퇴, 이런 기사 나면, 어휴."

  "정말로."

  "됐네요. 난 누구랑은 달리 마음 넓은 애인이라서 일은 이해해 주거든."

  "결국 네가 하고싶은대로 했으면서."

 

  유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예림의 허리를 꽉 안았다. 역시 그 때 더 말렸어야 했나. 그랬다면 길드장 같은 직책이 없는 예림은 이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말랑한 볼의 부피를 아쉬워하고 있는데 예림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요새 잘 지내지?"

  "나도 얼굴 거의 못 봐서. 그래도 무리하는 일 없도록 하고 있어. 그나마 은혜가 있어서 다행이지."

  "피스는?"

  "뭐 걔야."

  "명우오빠랑 노아오빠 소식은 들은 거 있어?"

  "글쎄, 형이 더 잘 알지 않을까."

  "네 팀에 있던 그 길드원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번쩍 들렸다. 유현이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예림을 무릎 위에 앉힌다. 예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드러난 목덜미에 연신 쪽쪽거리면서, 유현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그 사람들이 나보다 중요해?"

  "아, 한유현, 유치해!"

 

  예림이 품에 안겨 버둥거렸다.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는 유현을 보더니 반항을 포기한다. 제 연인이 질투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다. 이걸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오랜만에 보니 유치한 것까지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예림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유현의 볼에 쪽, 하고 뽀뽀를 남겼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팀원들은 네 사람이잖아. 너하고 합 맞추는 사람들인데 어디 다치진 않았나 궁금할 수도 있지."

  "그럴 시간에 내 걱정이나 좀 해봐."

  "아, 쫌."

 

  평소라면 조금 더 농담따먹기를 주고받았겠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은데다 근 삼 주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유현은 말을 더 잇는 대신 품 안의 연인에게 깊이 키스했다. 예림도 유현의 목을 안고 꼭 매달렸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예림이 속삭이듯 말했다.

 

  "끝나면 계속 같이 있을텐데 뭐."

  "..그래. 몇 개월만 지나면."

  "몇 개월만 지나면."

 

  게이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예림을 내려놓고 한 번 더 안으며 유현이 속삭였다. 사랑해. 예림이 웃었다.

 

  "나도 항상 사랑해."

 

 

*

 

 

  차 안에서 쪽잠을 잤는데도 몸이 일주일쯤 잠들지 못한 것처럼 무거웠다. 유현은 전기톱으로 두개골을 살살 갈아내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거리에 서 있었다. 처참하게 부서졌다가 이제 어느정도 보수된 대로를 건축자재들을 실은 덤프트럭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가게들도 하나둘 영업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유현은 그 모든 것이 납작하고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앞에는 몇 분단위로 아이들의 위치를 알리는 알림이 도착하고 있었다. 따로 인솔자는 없냐는 질문에, 신입은 아이들끼리 몰래 나온 것으로 보이며 상가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찾는 것 같다고 알려왔다.

 

  [ 5분 후에 그 쪽으로 도착해요! ]

 

  유현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일을 처리하기에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아직 치안이며 전산망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니 원장이 알아채고 뒤늦게 실종신고를 하더라도 수사가 늦어질 것이다. 유현은 무감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섰다. 두통이 지나치니 오히려 다른 부분이 무감해져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예리한 칼날을 확인하고 필요한 사항을 판단한다. 일이 끝난 후 브로커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뒷처리는 누구에게 맡길지, 과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을.

 

  오늘만 지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현은 '원래'가 무엇인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본 사진의 색감이나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예림의 손이 어느 정도 크기였는지, 닿을 때의 온도가 어떠했는지... 문득 유현은 예림이 돌아온다고 해도 제가 그런 것들을 영영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확실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래.

 

  그래서일 것이다. 예림이 돌아오면, 예림만 돌아온다면 세상은 다시 선명하고 분명하며 명확해질 것이다. 유현은 골목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아주 멍하고 현실감이 없다. 아이는 다리가 다 나았는지 걷는 폭이 퍽 자연스러웠고 손에는 문구점에서 팔 법한 파란 동전지갑을 달랑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무방비한 상대는 없었다.

 

  죽여. 마음 속의 목소리 하나가 속삭였다. 그 모든 꿈은 너를 이곳으로 밀어내기 위한거야. 네가 가져야 할 미래를 일깨워주기 위한거야. 꿈에서 다시 봤잖아. 예림이 살아있던 시절의 세상이 얼마나 빛났는지, 흘러가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달았는지, 사랑스러운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 이 세계가 얼마나 쓸쓸하고 무감한지를 봐. 저 애만 죽이면 네 세계는 다시 선명하고 따뜻해질 거야.

 

  사랑하던 것들을 되찾는거야.

 

  유현은 아이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 때 아이의 지갑에서 동전 하나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어어, 소리를 내며 눈동자가 댕그래진 아이들의 시선이 굴러가는 동전을 따라갔다. 뒤늦게 달리기 시작한 아이가 간신히 손을 뻗어 동전을 잡는 것이 보였다. 유현은 아이가 오백원짜리 동전을 집어들며 안도하며 웃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뛰어든 콘크리트 차도 위로 덤프트럭 하나가 왼쪽으로 급히 페달을 꺾으며 급브레이크를 밟는 것도 보았고, 차도와 타이어가 마찰할 때 나는 찢어질듯한 소리와 고무 타는 냄새가 확 풍기는 것도, 반동으로 트럭 가득 실린 철근이며 건축자재들이 균형을 잃고 아이의 머리 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쏟아져 내리며 아이의 동공이 그보다도 더 천천히, 무시무시하게 느린 속도로 확장되는 것을...

 

  그 순간은 왜 그렇게 선명하던지.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유현은 퍼뜩 숨을 뱉어냈다. 세상이 한순간 멈췄다가 갑자기 빵빵거리는 소리, 괜찮냐고 물어오는 운전기사의 경악스러운 소리, 지나가던 행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아이들의 우는 소리로 가득차 견딜수 없이 선명하고 소란스러웠다. 유현은 온몸이 흠뻑 젖도록 식은땀을 흘린 채 반대편 차도에 서 있었고 옆구리에 안긴 아이는 놀랐는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옷의 축축함과 매캐한 공기와 숨을 쉬는 감각이 믿을 수 없이 분명했다. 유현이 대답도 하지 않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자 행인들 몇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어떡해, 어디 잘못된 거 아냐? 여기 물 좀 가져다주세요! 그런데 아까 봤어? 유현은 갑자기 다가온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배 아래로 팔딱이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유현은 자신이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알았다.

 

 

 

 

8.

 

  그날 죽은 것이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너는 나를 따라와 주었을까.

 

  네가 그러지 않았으리란 걸 알아. 나는 오만하게도 그것이 네가 나를 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사랑의 크기가 작아서라고. 그러니 네가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네 세계에서 내가 커져 언젠가 너의 전부가 되는 날이 올 줄 알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너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상실을 한번 겪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약했다. 네가 나를 약하게 만들었어. 쓸모없는 순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스쳐 지나간 장소 하나하나에 감정을 덧붙이게 만들었다. 닮지 않은 타인에게서 너와 닮은 조각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져 나는 너를 만나지 않았던 시절처럼 태연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다. 쉬운 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무너지고 실패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떠날거면 그 날 내게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지. 그 날 나를 위로하지 말았어야지. 이해를 주고받는 일이 따뜻하다는 것을,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간다는 감각을 깨닫게 하지 말았어야지. 세계에 소중한 것이 하나 뿐이라, 그것만 지키면 족하고 그것뿐이면 안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했어야지. 상실에 괴로워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를 잃으면 더 잃을 것이 없어 평안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지.

 

  나는 너처럼 강하지도 않은데.

 

 

 

 

내가 키운 S급들 ┃ 한유현 X 박예림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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