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지면부터 수평선까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드로시아를 보았을 때, 유현은 벌을 받는 것일까 생각했다. 예림을 결국 살려내지 못했으니 이대로 밤마다 함께했던 날들의 꿈을 반복해서 꾸게 되는 것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억들을 헤집으며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일은 나쁘지 않은 감옥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현의 기대를 산산조각내듯 찬찬히 둘러본 주변에는 기억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유진도, 문현아도, 노아도, 시그마도 존재하지 않았다. 깎아지른듯한 빙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해변에는 극지방 특유의 맑고 시린 공기만 가득했다. 햇살은 눈 위에 반사되어 조용히 반짝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곳에 예림이 있었다.
예림은 등을 돌리고 끝없이 얼어붙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유현은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도드라진 얼음덩이 몇 개에 걸려 휘청이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발 밑을 보거나 다른데로 시선을 돌리면 예림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예림이 고개를 돌렸다.
"한유현."
유현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기억에 없는, 기억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예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유현은 조심스레 예림의 뺨에 떨리는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에 와닿는 뺨이 부드럽다. 품에 안겨드는 부피가 익숙했다. 귀를 간질이는 짧은 머리의 감촉도 기억 그대로였다. 유현이 간신히 한마디를 뱉었다.
"...박예림."
"응."
"예림아."
"응, 여기 있어."
"예림, 예림아.. 나는, 나는..."
몸이 덜덜 떨리고 말 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예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은데. 묻고 싶은 것도 아주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머리가 텅 빈것처럼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는 멍하니 예림의 이름만 나왔다. 어쩌면 아주 오래 이것만을 원해와서 이대로 계속 있을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림이 팔을 뻗어 유현의 등을 마주안으며 입을 열었다. 한유현.
"많이 아팠어?"
댐에 물을 저장하듯 꾹꾹 담아오던 유현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아팠어. 아파 죽을 것 같았어. 폐에 물이 들어찬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어. 몸에 백톤짜리 철근을 달아놓은 것처럼 팔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았어.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유현이 떨면서,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뭘 보든 자꾸 네가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게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았어.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안보면 안봐서 미칠 것 같았어. 배구공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 너를 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너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너를 살리고 싶어하지 않아서, 예림아, 나는, 너무 외롭고... 배신감이 들었는데, 그런데 나도,
"죽일 수가 없었어....."
그게 그렇게 힘들 줄 몰랐어. 내가 너무 약해져서, 아예 다른 사람인데, 자꾸, 네가 떠올라서... 그 말을 끝으로 유현은 오래오래 뒷말을 잇지 못했다. 예림의 따뜻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곳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인 듯 호흡했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떨림이 잦아들자 예림이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희생하려고 한 건 아니야."
"..."
"그냥 몸이 먼저 나갔어."
"..그 애한테 뭔가를 비춰봐서?"
"그렇게 구체적인 건 아니야. 아예 다른 사람이라도 구했겠지. 그냥... 내가 무섭고 고통스러운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다른 사람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
그냥 겨우 그정도로도. 예림이 살짝 웃었다.
"너도 고아원 고양이랑 우리가 밥주던 고양이랑 닮은 점은 같은 종이라는 것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공감은 하지? 네가 한 일이잖아. 애정을 준다는 건 그런 거니까."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그 대상에만 한정지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유현의 어깨가 다시 떨려왔다.
"...그럴 가치가 있어?"
"한유현."
"죽을 것 같아. 전투가 끝나고, 형도 무사하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날처럼 숨을 참아볼까도 생각했는데,"
"형이랑 피스랑 유명우나 석시명이나 같이 보았던 것들이나.. 들었던 것들이,"
"계속 생각이 나는거야.. 계속, 계속... 고통스러운데 놓을 수가 없었어. 고통이 그치지가 않았어. 결국 나는 너를 살리지도 못했고, 네가 아닌 다른 애정들에 묶여서 나를 죽이지도 못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내가, 내가 너를 덜 사랑하게 된 것 같아서...
떨리던 목소리의 끝자락에 물기가 섞이고 예림의 어깨에 희미한 온기가 젖어든다. 유현은 유현이 그토록 분노하던 평범한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죽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아주 약한 사람이 되어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떠날거면 왜 이런걸 알려준거야? 어떻게 모두가 이렇게 연약한, 언제 잃을지 모를 수많은 것들에게 기대서 살아가? 너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통은 알 필요도 없이 하나를 잃으면 그대로 깔끔한 끝을 맞이할 수 있었을텐데. 이런 건 원하지 않았어. 이런 건...
"그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 더이상 안볼거야?"
예림이 유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거 다 없었던 일이 되어도, 아무 것도 아니었을 순간들이 되어도 상관없어? 와, 한유현 실망이다."
"...아니, 나는,"
"됐어, 버스 지나갔어. 다음 생에는 한유현보다 키크고 돈많고 다정한 사람 만난다, 내가."
"잠깐만,"
"나 덜 사랑하는 것 같다며? 후회된다며? 그럼 나도 딴남자 찾아서,"
"..싫어."
팔에 힘이 꽉 들어가더니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어온다.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를 걸고 농담을 하던 예림이 화들짝 놀랐다.
"자, 잠깐, 한유현 울어?"
"..."
"아니 나는, 니가 헛소리를 하니까... 그냥 평소처럼 농담한건데... 잠깐 얼굴 좀 들어봐."
"..잖아."
"뭐?"
"다음생이 아니라 이번 생이라도... 죽은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금방 잊고 다른 사람 만났을 거잖아."
"...그래도 사귀기까지 했는데 신뢰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드냐 한유현?"
"넌 원래 정 주는 사람도 많으니까... 금방 이겨내고 다른 사람한테 먼저 손 내밀 것 같아."
"..."
"남의 속은 먼저 헤집어 놓았으면서 나는 왜 좋아졌는지도 못들었고, 그러면서 그렇게 쉽게 딴사람 만난다고,"
"그만."
예림이 유현의 어깨를 일으켜 세우더니 정신차리라는 듯 양손으로 뺨을 툭툭 두들겼다. 뚱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다시 꽉 안아오는 것을 보며 예림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말 안하고 갔으면 아쉬워서 어쩔 뻔했대.
"나 어렸을 때 이후로 누구한테 먼저 다가간 거 네가 처음이야."
"설마."
"진짠데. 내가 어디서 지내다 왔는지를 생각해 봐. 사실 너한테 손 내밀 때도, 음, 이거 좀 깨나? 별 기대는 안했어. 그냥 먼저 그래두면 나중에 다퉜을 때 명분은 생기니까."
마음으로 다가서는 일이 언제나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예림은 삼촌네 집에서 얹혀 살면서 그것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해를 받는 일 만큼이나, 누군가를 이해하려 먼저 다가갔을 때 거부당하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나는 내가 되게 쓸모없는 사람 같았거든..."
"네가 어딜봐서,"
"알아! 이제 아닌거."
하지만 그 때는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림에게 무관심하거나, 쓸모없고 밥값도 못한다고 비난하는 둘 중 하나였으니까.
"각성하고도 사실 잘 모르겠더라고. 내가 더이상 배를 곯지 않고, 강해지고,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사실 그건 순전히 어느날 생긴 능력 덕이고 내 본질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시절 그대로 남아있는 것 뿐 아닌가. 그런 불안감이 항상 있었어. 아저씨가 많이 사랑해주긴 했지만, 어쨌든 아저씨를 내가 선택한 건 아니잖아. 내가 S급이 되기로 선택한 게 아닌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유현은 처음 예림이 집에 왔을 때 유달리 유진에게 달라붙어 아저씨의 '보디가드'라며 강조했던 것을 떠올렸다. 유진이 납치당했을 때 유진이 한사코 괜찮다고 했는데도 계약서의 패널티를 받아들였던 것도. 그 때의 예림은 뭐랄까, 간신히 가지게 된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절부절하는 동시에 ㅡ그런 점이 자신과 닮아보였는지도 모른다ㅡ 그만큼의 쓸모가 있음을 증명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잘못했다가 내쳐질까봐.
"근데 네가 그날 손을 잡아줬잖아."
유현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날을 세웠다.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민 손을 거절당하는 것은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유현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내민 손을 맡잡아 왔다.
'어?'
피하지 않았다.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도, 더 오래... 타인과 맞닿은 온기가 이상해 예림은 급히 손을 떼었다. 목구멍에서 넘어올 것 같은 간질간질한 기분을 화로 감추면서.
그 날 이후로 유현은 변했다. 예림은 유현이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유진만 없다면 서로 소 닭보듯 외면하던 것이 투닥대면서도 제 영역 안의 사람이라고 인식하는지 먼저 챙겨주는 것이 보였다. 유진이 없는 날이면 가끔 계란프라이를 완숙으로 익혔고 장을 볼때면 예림이 자주 먹는 컵라면도 하나씩 달랑달랑 들고왔다. 예림은... 둘의 관계가 변했음을 알았다. 스스로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노력하면 관계가,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유현은 예림이 먼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내민 손 뒤에 숨은 노력이나 망설임,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네가 있어서 나도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거야."
예림은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거절과 실패를 겪어도 괜찮다. 사람은 큰 위기가 닥쳤을 때가 아니라, 더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포기하게 된다. 예림은 이미 그러한 시도들이 무의미한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예림의 노력에 응답해 준, 가장 강력한 애정의 증거가 옆에 서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날들에서, 내가 너의 세계를 넓혀주었듯 너도 나의 세계를 넓혀준 것이다.
"아카테스에서 아저씨 잠깐 잘못됐을 때 나하고 피스가 생각났다며.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들 옆에서 죽고 싶었다고."
"..."
"처음 누군가를 잃고는 어떻게 죽을지 생각했던 네가, 이젠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했다면, 나를 덜 사랑하게 된 게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더 많아진거지."
너와 나의 세계가 그때보다 더 넓어진 거지.
"한유현, 고생 많았어. 많이 아팠지."
예림이 그 날의 드로시아에서처럼 말했다. 그날과는 달리 유진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이리와, 안아줄게."
유현을 안았다.
예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따뜻한 눈물로 젖어든다. 유현은 마지막이 다가옴을 알았다. 옷 아래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을, 애정이 배어있는 말들을, 마지막이 될 웃음을 정성들여 안았다. 가슴께로 제 것이 아닌 눈물들이 한두방울 스며들어, 유현은 예림도 울고 있음을 알았다. 예림이 물기 섞인, 하지만 묘하게 편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세계를 나한테 열어줘서 고마웠어."
"...."
"힘들 땐 주변 사람들한테도 좀 기대고, 나랑 아저씨랑 피스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도 많이 만들어 보고, 천천히 와."
"..연습 많이 해볼게. 다음에는 먼저 손 내밀 수 있게."
"진짜지. 기대하고 있는다."
잘 있어. 예림이 속삭였다. 유현이 답했다. 최대한 괜찮으려 노력하면서, 그리고 아마도... 괜찮아질 목소리로.
"잘 가."
*
햇살이 비스듬이 비추어 들어왔다.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명치며 심장에 걸려있던 날카로운 것들도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아주 독한 감기를 앓았다가 어느날 일어났더니 마침내 다 나았음을 깨닫게 되는 아침처럼, 편안하며 맑은 기분이었다.
유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서랍을 열었다. 서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유현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어여왕의 귀걸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언제 빛을 낸 적이 있었냐는듯 귀걸이는 잠잠했다. 손이 무심코 아이템 설명을 클릭했다.
[ 창랑의 인어여왕의 귀걸이 (SS급)
창랑의 인어여왕이 어린 시절 사용했던 귀걸이.
물의 지배자의 힘이 깃들어 더욱 강력해졌다. ]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유현은 엉엉 울었다. 예림이 죽은 날 이후로, 한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모조리 뱉어내듯이 울었다. 막 태어나 처음 울음을 배운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며 울었다. 유현은 그제서야 그 모든 꿈들이 기나긴 장례식이었음을, 자신이 예림과 완전히 이별했음을 깨달았다.
유현은 그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해 세계를 좁히고 쳐내어 종내는 딱 하나만 남게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만들었던 모든 순간과 장소와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져 넓어지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는 소중한 단 하나를 위해 쉽사리 목숨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넓어진 유현의 세계에 예림이 사랑했던 것들이 가득 남아 그걸 버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건 이미 유현이 사랑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아 무서워진, 아주 약한 사람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아주 강한 사람이 되었음도 알았다. 이제 상실은 유현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하나가 사라지더라도 다른 수많은 하나들이 유현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을 것이기에.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림을 잃었기 때문에 아니라... 예림을 사랑했던 시간이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아이템마저도 저를 가졌던 사람의 기록을 남기는데, 사람이 사람을 만났는데 흔적이 남지 않을리가 없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씨앗이 어느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완전한 상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현은... 예림이 없는 세계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 안에서 예림을 키웠던 것들과, 예림이 사랑해서 지키려고 했던 것들과, 예림을 닮은 것들을 조금씩 찾다 보면,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처음 보는 아이를 구했던, 네가 이 세계를 사랑했던 방식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현은 한참을 더 울었다. 다행히 그럴 시간이 넉넉했다. 조금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억눌렀던 슬픔을 충분히 풀어내고 난 후에는, 씻고 면도를 하고 밥을 먹을 것이다. 그 후에는 걱정하고 있을 형에게 찾아가고, 그 날 신입을 만난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돌리고, 피스도 한 번 보러가고, 밀린 길드 일을 처리하고, 아이가 잘 돌아갔는지도 알아보고, 그리고... 주말에는 시간을 내어 예림을 보러 갈 것이다. 유명우가 얼음창을 바다에 뿌리기 좋은 형태로 다시 가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무기였으니 예림도 그 편을 좋아하겠지. 유현은 인어여왕의 귀걸이는 조금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유현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예림과의 추억을 기쁜 마음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된다면, 이 귀걸이의 다음 기록을 이어갈 적절한 이를 찾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전까지는 유현도 가끔 그리움을 감당할 유형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림도 이해할 것이다. 유현은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거실 창가로 초여름 햇볕이 가득 쏟아 들어온다.
그 날, 드로시아에서 네가 나의 위로가 되었을 때, 온통 눈과 얼음뿐이던 그 곳에 잠시 여름이 찾아온 기분이 들었지.
유현은 저들끼리 까불며 일렁이는 햇볕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