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사랑한 여름에 대하여
볼펜똥 @Bolpenddong
* 사망, 약간의 유혈 묘사 주의
* 유현과 예림이 성인이 되어 사귀고 있던 상태입니다. 문피아 기준 한유현의 세계(2)와 물의 정령(1)화에서 가져온 대사 인용이 있으므로 스포를 주의해주세요.
* 특정 인물의 감정 묘사시, 보기에 따라 편협하게 느껴질 수 있거나 다른 인물들을 나쁘게 묘사하는 서술이 있습니다.
0.
박예림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눈부신 여름날이었다. 수평선은 뭉게구름을 걸치고 햇빛은 엷은 너울이 되어 파도에 일렁인다. 갈매기 몇 마리가 우는 소리를 제외하면 해변은 고요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날거나 헤엄치지 않으면 접근이 힘든 해변은 유진이 고심해서 고른 장소였다.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예림이 보았다면 분명 마음에 들어했으리라.
부우우- 예림의 정령이 떨리는 음으로 울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서 간헐적으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유진이 예림의 시신을 조심스레 바다에 내려놓는다. 파도는 춤이라도 청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시신을 밀어냈다 끌어왔다. 격렬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피부가 깨끗해, 평화로운 바다 위에서 잠시 낮잠이라도 든 것 같다.
뒤에서 기어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예림의 팀원 중 하나이리라고 유진은 추측했다.
열대어를 닮은 정령이 예림의 위에 내려앉았다. 나풀거리는 지느러미로 보호하듯 시신을 감싸안는다. 충분히 깊은 곳까지 이르자, 예림의 몸이 정령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았다. 고요하던 해변은 울음과 통곡소리로 가득했다. 유진 역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정령은 한 세계보다도 긴 시간을 살아간다. 예림과 함께 싸운 이들이 모두 늙어죽고, 그 자식의 자식의 자식도 죽어 뼛조각도 남지 않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예림은 빛도 들지 않는 바닷속에서 정령의 보호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세계의 끝이 오는 순간까지. 세계의 멸망을 막으려다 죽은 이만이 진정한 멸망을 맞을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멸망은 미뤄졌다. 마지막 전투가 끝나자 생지옥 같던 지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복구되었다. 여전히 강력한 스킬과 던전 부산물로 발전을 거듭한 기술 덕택이었다. 하지만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아, 유진은 삶이 다시는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해변을 한바탕 휩쓴 슬픔이 잦아들고, 유진은 모여든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유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멸망을 미룬 세계로 찬란한 여름이 찾아들고 있었다.
1.
[ 작은 물방울을 살릴 수 있어요! ]
마지막 전투가 끝난 직후, 일행은 다친 몸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시스템에게로 찾아갔다. 요구사항은 간명했다. 예림의 소생. 걱정과는 달리 신입은 흔쾌히 수락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시신을 미친 사람처럼 끌어안고 있던 유현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지금 당장-"
[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
분위기가 다시 죽일듯이 흉흉해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유현이 으르렁거리며 칼집에 손을 가져가고 유진이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너희 말대로 세계까지 구했는데 뭘 더 바래? 허튼소리 할거면-
신입이 당황해서 통통 튀었다.
[ 뭔가를 더 바라는게 아니에요!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에요. 적어도 작은 물방울이 살아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재'가 필요하다고요! ]
"알아듣게 말해."
[ 작은 물방울이 죽게 된 원인을 제거해야 살릴 수 있어요. ]
"뭐? 몬스터라면 이미 처리했는데,"
[ 그건 원인이 아니죠. 원래라면 작은 물방울은 그 정도의 몬스터한텐 죽지 않았을테니까. ]
작은 물방울이 살린 사람이 하나 있지 않아요?
일행 위로 얼어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지막 전투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폐건물로 숨어든 아이가 하나 있었다. S급 헌터의 감에는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SS급 몬스터는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건물이 무너지고 도망가는 아이의 뒤로 몬스터의 거대한 손이 날아드는 것은 찰나였다. 원거리 헌터인 예림이 무리하게 몸을 날린 이유이기도 했다.
멸망에 맞서는 전투가 거의 절정에 달할 즈음이었다. 과포화된 던전은 땅 뿐만 아니라 바다나 하늘, 나무둥치, 심지어는 책상 서랍에서까지 종기처럼 솟아올라 몬스터를 토해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 시계의 초침이 한 번 움직이는 그 순간을 다시 열번으로 나눈 찰나가 생과 사를 갈랐다. 마지막 순간 힘껏 밀쳐낸 팔에 의해 튕겨나간 아이는 살았다. 몬스터는 몇 초 후 미친듯이 달려온 유현에 의해 절명했다.
예림은 무너진 건물 잔해에 박혀 잠든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거야?"
신입이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 논리적으로 아이가 살았다면 작은 물방울은 살아있을 수가 없죠. ]
"...다른, 다른 방법은 없어? 대가를 치를테니,"
[ 저희는 작은 물방울을 살리는 '대가'로 그 애를 죽이라고 하는게 아니에요, 허니. 그냥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죠. 허니한테 퍼즐을 맞추는 건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 자리에 다른 퍼즐 조각이 있다면 집어넣을 수 없는 것처럼. ]
간단하고 명쾌하며, 잔인한 설명이었다. 일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예림이 그 순간 아이를 구한 것이 옳은 행동이었는지, 반드시 그랬어야 했는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생명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백 사람의 생명이 한 사람의 생명보다 귀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바에야... 아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그 생명의 가치가 덜해지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예림은...
"기한은?"
"유현아!!"
반사적으로 유현을 돌아본 유진이 흠칫했다. 유현의 얼굴은 깨지지 않는 견고한 성 같았다. 방금의 슬픔이나 분노는 모조리 그 안에 가둔 것처럼. 신입이 답했다.
[ 이론적으로는 시간제한은 없어요. 하지만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걸요. 어디까지나 영향력을 제거하는 문제니까. 하다못해 그 아이가 나무를 심는다고 하면 그 나무도 제거해야 하고, 하루를 더 산다고 하면 먹게 될 물, 음식의 출처, 그로 인해 오를 회사의 매출이라던가... 미세한 오차 정도는 저희가 해결할 수 있지만 한 번 나비효과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요. ]
"되살리는데는 다른 조건은 필요 없는건가? 시신이 온전해야 한다던가."
[ 없어요. 지금의 육체야 작은 물방울을 살려내면 인과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질거에요. ]
"알겠어."
"한유현!!"
유진이 새하얀 낯으로 유현을 붙들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살해할 듯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유현을 말리듯 본능적으로 잡았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주춤했다가, 다시 팔을 꾸욱 움켜잡는다. 소영과 문현아, 노아, 유명우 등이 유현과 대치하듯 유진의 뒤로 둥그렇게 모여섰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 나도 예림이를 살리고 싶지만, 하지만 이건,"
"형."
유현이 희미하게 굳은 미소를 흘렸다.
"나는 형이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형도 나 때문에 시간을 돌렸다며. 아니면 박예림은 그만큼은 소중하지 않아?"
"그 말이 아니잖아! 차라리 시간을 한번 더 돌리면,"
"운이 좋아서 간신히 견뎌낸 것 알잖아. 또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그리고 나는 사실... 형이 왜 지금 나하고 대치하듯 서있는지도 모르겠어."
유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의 건너편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어쩔줄 몰라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영과, 도리어 차분해진 얼굴의 문현아에게 일갈했다.
"브레이커 길드장과 강소영, 당신들도. 박예림과 친한 것 아니었나?"
"저, 저는... 예림이가..."
"노아 루히르와 유명우도 마찬가지야. 박예림이 그렇게 의지했는데."
지금 박예림을 살리려는 게 나 혼자만이라니 믿을 수가 없네. 유현이 헛웃음을 쳤다. 유진에게 걸어가더니 안고있던 예림의 시신을 넘긴다.
"형 뜻이 그렇다면 '이건' 형이 가져. 어차피 살아나는데는 필요 없다니."
"유현아, 다시, 다시 생각을..."
"귀걸이랑 무기는 내가 가져갈게. 박예림이 돌아오면 돌려줘야 하니까."
말을 마친 유현이 던전의 출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일행을 돌아본다. 이제까지의 대화를 이해한 것이 틀림없었음에도, 예림의 정령은 예림의 시신 옆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현의 적대적인 시선에서 예림을 보호하듯 슬쩍 감싸안기까지 한다.
"...당신들은 시체나 안고 있어."
나는 살아있는 박예림을 돌려받아야겠어.
2.
유현은 던전에서 나온 즉시 아이의 소재를 찾도록 조치했다. 전투 중 국가기관 전산망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주민등록은 엉망이 되었지만, 합법과 불법 사이에 걸쳐있는 어둠의 루트들은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더 유용한 법이다. 며칠 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가 도착했다. 아이는 고아였고, 지금은 임시 보호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고아라면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는 것은 쉬울 것이다. 아랫사람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유현은 직접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시스템의 존재를 모른다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예림이 돌아온 것과 예림이 구한 아이의 실종을 연결지어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모를 위험요소를 남겨두는 것은 피해야 했다.
유진에게서 예림의 장례식이 끝났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 ...해서 끝났지만, 너도 혹시 시간이 된다면... 인사라도 와. ]
유현은 답장하는 대신 핸드폰을 그대로 구겼다. 종이 구겨지듯 부서진 부품들이 손가락 사이로 후두둑 떨어진다. 답장하지 않는 것이 유현으로서는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가 거길 왜 간단 말인가. 지금 잠시 없을 뿐, 앞으로 계속 살아있을ㅡ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ㅡ 사람의 장례식에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날 이후, 유현은 유진을 포함해 그 날 신입을 만났던 이들을 의식적으로 사고의 한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아이를 찾아보고 증거가 남지 않도록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바빴지만,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의 반응을 우려해서였다. 유현은 예림이 사랑했던 그 얼굴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분노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끝내 예림을 외면했던 그 얼굴들을.
그러나 유진의 문자를 받자 간신히 가라앉힌 감정들이 불쑥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말이야말로 기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의 죽음과 심장을 떼어줄 듯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어떻게 같은 무게로 매달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후자를 중히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현은 예림이 하루를 더 살아가는 값으로 하루에 한 명씩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 얻은 힘이다. 그러려고 올라온 자리다. 그런데 예림이 사랑했고 예림을 사랑했다던 당신들이, 어떻게 그 앨 외면할 수가 있는가. 그깟 윤리나 도덕이 뭐라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예림보다 아끼는 얄팍한 감정도 사랑이라면, 예림에게 그런 사랑은 필요가 없었다. 형은... 원래 어린 것들에 약한 사람이니 잠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예림이 다시 나타나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예림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도련님, 되살아난 예림이한텐 말할 수 있어? 본인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던전을 나오기 전, 문현아가 던진 말이 뇌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유현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으며 단어들을 다시 기억 깊숙한 곳으로 쳐박으려 노력했다. 쓸데없는 감상은 결단의 순간 사람의 발목을 잡고 판단을 흐린다. 그런 것은 살려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유현은 바로 내일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유현은 서랍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빛을 보았다.
3.
누군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이 뜨였다. 죽은 짐승처럼 적막한 집 안을 어둠이 감싸안고 있었다. 아니, 완전히 어둡지는 않다. 희미한 빛무리가 거실을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저것 때문에 깬건가?
유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일어났다. 거실 서랍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며 번져나온다. 유현은 그 쪽으로 다가가 홀린듯이 서랍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인어여왕의 귀걸이가,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다.
인벤토리에 넣어둔 귀걸이가 왜 여기 있지. 인어여왕의 귀걸이에 빛나는 기능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유현은 홀린듯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눈앞의 풍경이 흐려지듯 바뀌었다.
*
유현은 거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늦은 오후의 쨍한 햇살이 눈을 찔러대고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열기가 올라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부채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유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보다 가로수 그늘 아래 익숙한 신형을 발견했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박예림!'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튕겨나간다. 뒷목을 덮은 검은 머리카락이며 살짝 벌어진 입술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선명했다. 갈망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다. 어서 반짝이는 시선을 잡아채고 익숙한 체온을 품에 안아 말해주어야 했다. 네가 그렇게 가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를, 상실이 사람의 목을 어떤 식으로 조이며 여기저기 네 흔적이 남은 곳에서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힘껏 뻗은 팔이 예림을 껴안았다. 아니, 그러려 했다. 그러안은 손이 예림의 몸을 힘없이 통과해 지나간다.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에 유현이 몸을 흠칫 떨었다. 허공을 휘저은 손이 만질 수 없는 것을 연신 움켜쥔다.
예림이 바로 거기 서 있는데 닿을 수가 없었다.
'예림아, 박예림.'
말을 뱉고 유현은 다시 놀랐다. 내뱉은 말이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전달할 공기가 없는 것처럼 진공에서 힘없이 흩어진다.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의 따뜻함도, 지나가는 바람도, 귀를 울리는 매미 소리도, 바로 앞에 선 예림의 속눈썹이며 보조개도 선명한데 유현은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을 뿐 자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예림은 여전히 유현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손부채질을 하며 그늘 아래 서있을 뿐이다. 말도 안돼. 예림이 바로 앞에 있는데 잡을 수가 없다. 살아있는 너를 다시 보기를 얼마나 갈망했는데. 닿을 수도, 말을 건낼 수도, 안을 수도...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폰을 두드리며 누군가에게 연신 카톡을 보내던 예림이 유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한유현! 더워 죽겠는데 이제 와?"
유현은 그것이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고개를 돌리니 처음 달려온 자리에서 또 다른 유현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유현은 본능적으로 영혼이 옷을 걸치듯 몸을 입었다. 손 끝에 퍼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문자 받은지 10분도 안 지났어."
"순간속도 상승은 어디다 팔아먹고?"
"그걸 네 갑작스런 일정 맞춰주는데 쓰겠어? 꿈이 크시네."
전투 도중 망가졌던 손목시계가 손목 위에서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금이 갔던 인어여왕의 귀걸이도 예림의 귀에서 멀쩡히 흔들린다. 그제서야 유현은 깨달았다. 일년 전의 여름이다. 이제는 죽고 없는 제 연인이, 스무살 초입에 들어섰을 해의 그 여름. 이 꿈은 기억의 외피를 쓰고서만 유현의 행동을 허용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조종하듯 손이 저절로 움직여 예림의 머리에서 나뭇잎 하나를 털어낸다. 하는 김에 머리도 잔뜩 헝클어 놓았다. 간절히 원하던 체온이 손 끝에 감긴다. 따뜻해. 할 수만 있다면 한없이 그렇게 있고 싶었지만, 기억은 무정하게도 유현의 손을 떼어냈다. 졸지에 까치집이 된 예림이 성질을 낸다.
"하지 말랬지!"
"시간 없다면서. 빨리 출발이나 해."
유현은 꿈에 모든 것을 맡기고 예림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유현은 그 해 여름 예림에게 고백할 의도는 없었다.
정확히는 예림에 대한 감정이 동료애나 가족에 대한 애정 따위가 아니라 성애적인 무엇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건 스물 다섯해를 흑백 색맹으로 살아온 사람이 어느날 하늘색을 보았을 때 희미한 회색이겠거니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빤히 보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유현의 무자각에 대해 변명을 좀 해보자면, 유진으로 대표되는 내리사랑만이 유일한 사랑의 형태인 줄 알았던 유현에게 그나마의 스펙트럼을 만든 것 역시 예림이 처음이었다. 사랑 혹은 무관심으로 나뉘는 흑백의 세계가 아니라, 때때로 짜증나지만 함께 있는 것이 나쁘지 않고 유대감도 느끼는 기묘한 회색지대. 보통의 사람들이 여섯살 즈음 깨닫게 되는 인간관계의 오묘함을 스무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 셈이다. 그러니 그 후 5년이 지나서야 성애의 감정을 깨닫게 된 것도, 늦디늦은 진도에 비하면 기특한 일이었다 할 것이다. 유현이 그것을 깨닫는 과정은 몇 년 전 드로시아에서 예림이 마음 속에 뿌려놓은 씨앗 하나가 지난한 투닥임과 친밀감의 시간들을 거쳐 싹을 틔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 예림이 스무살이고 유현이 스물 다섯살 즈음의 둘은, 서로를 조용히 참아 넘기는 단계를 지나 이젠 꽤나 친밀한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예컨대 꼭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함께 보러 갈 사람이 없을 때, '야, 나와!'라고 외칠 수 있는 사이라던지.
"그걸 꼭 지금 봐야 해?"
물론 친밀함은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5월의 막바지라 계절은 아직 봄인건만, 태양은 벌써 여름을 맞이한 것처럼 뜨거웠다. 유현은 더위에 약한 예림이 왜 기어코 해가 떠있을 때 밖에 나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야영화를 보면 될 것을. 사실 여차하면 영화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도 되겠지만 예림은 인식방해 안경을 쓰고 나오는 것을 더 선호했다. 괜히 성현제처럼 시선 끄는 일 없이 사람들 사이에 복닥복닥하게 끼어앉아 팝콘이나 나쵸를 먹고 싶다나. 유현은 팝콘을 종류별로 세봉지씩 주문하고 나쵸 두어개와 콜라 다섯잔을 사가는 S급 헌터다운 먹성이 과연 '시선을 끌지 않는 일'인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못내 수긍했다.
"안 돼. 영화보고 한강가서 맥주도 마실거란 말이야. 심야영화 보면 너무 늦어."
"아주 작정하고 나왔네."
"휴가잖아! 작정하고 보내려고 했으면 벌써 비행기 탔지. 말 나온김에 휴가좀 늘려봐, 길드장님아."
"놀아줄 사람 없다고 징징댔으면서 더 쉬어서 뭐하게?"
예림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 얼음잔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음료를 다 마셨는지 빨대가 컵 바닥을 도로록 긁는 소리가 나자, 유현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들고있던 이온음료를 건냈다. 바닥을 드러낸 컵을 건내받고 다른 음료를 쥐어주는 일련의 과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예림 역시 시선은 앞에 고정한 채로 이온음료를 입에 갖다댔다. 몇 백번씩 연습한 듯 보지도 않고 이루어지는 동작이 앞에서 마주 보았다면 짜고치는 연극이라도 하는 듯 보였을 것이다. 물론 둘에게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평범하게 자기 갈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지만 서로의 기척에 항상 은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던전에서 몇 백번씩 합을 맞추는 일과도 맥을 같이 했기 때문에.
"친구도 없는 게. 너 휴가라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불러준거야."
"웃기시네. 내가 너하고 놀아주는거지."
유현이 가볍게 받아친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취미랄 것도 없으니 집에서 보내는 휴가에 불만이 있을 리 없다. 예림이 아니고서야 나오지 않았을 테니 유현의 입장에선 놀아주는 것이 맞았다. 물론 쉬는 날이면 하다못해 집 앞 마트라도 다녀와야 제대로 주말을 보냈다고 믿는 예림이 일부러 유현을 불러낸 것도 사실이니,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놀아주고 있다고 꿋꿋하게 믿고 있는 셈이었다.
"됐고. 영화 곧 시작하겠다."
영화관에 도착한 예림이 간식코너로 척척 걸어가더니 주문을 완료했다. 헌터치고는 하얗고 작은 손이 유현에게 팝콘을 한아름 안긴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날이었다. 둘은 원래도 몇 달에 한번은 종종 영화를 보러 왔다. 주로 예림이 소영이나 문현아와 시간이 맞지 않거나 유진이 사육소 일로 집을 비운 날에. 하지만 그 날 컴컴한 영화관에서 유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통통하고 작은 펭귄들은 아니었다. 유현은 팝콘을 건내던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칠해진 파란 매니큐어를 생각했다. 그게 대체 왜 생각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화 내내 그랬다. 영화의 배경이 남극이라 그런가 일본 던전에서 드로시아에 갔던 기억도 불쑥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지금 관심도 없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도 다 그때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재밌었냐는 예림의 질문에 유현은 대답하는 대신 불쑥 되물었다.
"매니큐어는 왜 발랐어?"
"응? 여름이라 기분내려고."
"그래서 파란색이야?"
"아니. 그냥 내가 파란색 좋아해서. 한유현 네가 봐도 예쁘지?"
예림이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반짝반짝 웃었다. 새파란 바탕에 하얗게 두 줄이 그어져 있다. 유현의 지식으로 매니큐어는 보통 열 손가락에 다 바르는 것이었지만 유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왜 새끼손가락에만 발랐냐고 물어보면 좀 이상할 것 같았다. 왜 그런 게 궁금한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
눈 앞에 푸른 점이 아른거린다. 파란 바탕에 흰 두 줄. 그것을 잡으려고 팔을 힘껏 허우적거리던 유현이 눈을 번쩍 떴다. 안 돼, 말라붙은 목에서 터져나온 소리가 거칠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눈을 미친듯이 비빈 유현이 상체를 빠르게 일으켰다.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 파란 것은 책상 위에서 굴러다니던 C급 마석이었다. 전투 며칠 전 삐약이가 가져다 놓았던가 한 모양이다. 있는지도 몰랐던 것. 하나도 닮지 않은 것. 방 안은 조용했다. 품에서 바스락거리던 팝콘 봉지의 가벼운 무게와 반짝반짝 빛나던 예림의 웃음소리 같은 것은 온데간데 없다. 갑작스레 현실이 폐로 밀려들어와 유현은 숨을 헐떡였다.
왜 물어보지 않았지. 그 때 한 마디라도 물어볼걸. 아무 말이나 해볼걸. 그러면 그 한 마디의 시간만큼 꿈에서 더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한 마디의 시간만큼,
예림이 없는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미룰 수 있었을 텐데.
서랍을 연 그 순간부터가 꿈이었는지, 언제 침대로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띠링,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울린다. 아이가 있는 시설의 봉사활동 신청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유현은 잠시 문자를 바라보다 폰을 뒤집어놓았다. 오늘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왠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성적인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본능적인 직감이 아이를 죽이는 즉시 꿈도 끝나버릴 것이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아이를 죽이면 예림은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올텐데. 지나간 추억 따위로 위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딱 하루만 더 미룬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4.
젓가락을 깨작이는 예림을 보며 유현은 반쯤 확신했다. 이 꿈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전개되고 있음을. 참아낸 하루를 칭찬이라도 하듯 꿈 속의 감각은 어제보다 더 분명했다. 그래봤자 유현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유현은 이번 꿈만 깨면 정말로 아이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꿈이 갈수록 더욱 현실처럼 다가와, 자신이 같은 다짐을 몇 번씩 반복하게 될줄은 꿈에서도 모른 채.
*
그 날 떡잎을 틔운 궁금증은 흙을 밀어내고 빼꼼이 자라났다.
영화를 보고 들어온 다음날, 유현은 저녁식탁에서 예림이 밥에 든 강낭콩을 전부 골라내는 것을 보았다. 그것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둘이 함께했던 식사가 천 끼를 넘어갔고, 그 중 예림이 싫어하는 음식을 골라낸 적은 최소한 오백번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유현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자신이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음을 깨달았다. 박예림은 강낭콩을 왜 싫어하지. 저번에 완두콩은 잘만 먹던데. 과거의 유현이 보았다면 정신이상 해제 아이템을 들이댈 일이었다. 강낭콩이 예림이 섭취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단백질원인 것도 아니고, 예림이 콩을 골라내든 골라낸 콩을 가져다가 땅에 심어 콩나무를 키우든 유현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저녁까지 그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유현은 저녁식탁에서 평소처럼 핀잔을 주는 대신 예림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강낭콩 싫어해?"
"어? 응."
"왜?"
왜냐고? 예림은 유현이야말로 왜 이런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유현을 쳐다보았지만, 어떠한 가능성이 머리를 스치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밥 아저씨가 했나봐.
"어렸을 때 목에 걸린 적이 있어서."
"아."
예림은 숟가락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지만 다음 시비는 날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형이 만든걸ㅡ아마 이 부분이 포인트일 것이다ㅡ 애도 아니고 편식하지 말라느니, 식탁예절도 없이 밖에다 골라내지 말라느니 공격을 걸어올 타이밍인데. '아'? 그게 끝이야? 유현은 답을 들었으니 됐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먹던 저녁을 다시 먹고 있었다. 예림도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한유현도 가끔 더위를 먹는 날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유현은 그날 이후로 시시때때로 예림의 기준에서ㅡ그리고 사회통념상으로도ㅡ 별 같잖은 시시껄렁한 질문들을 던져댔다. 이건 왜 좋은데? 저건 왜 싫은데? 그땐 왜 그랬는데?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데? 자신과 한 집에 사는것이 길드장놈이 아니라 왜? 병에 걸린 일곱살 애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무렵, 예림이 폭발했다.
"아 뭐!!! 왜 자꾸 물어대는데!"
"왜 화내는..."
"왜라는 단어입 밖에 꺼내지도 마!!! 외가리 외통수 외갓집 이딴 단어도 전부 금지야!!!! 알아서 뭐하게? 뭐 소개팅이라도 시켜주게?!"
안타깝게도 예림은 한유현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자신을 괴롭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는 가설에 모든 주식을 쓸어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유현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유현이 다소 핵심을 비껴난 키워드에 꽂혔다는 사실도. 유현이 아주 이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통 소개팅할 때 이런 질문을 먼저 해?"
"아니 미친놈아, 물론 너 정도로 하지는 않지! 그냥 서로 취향 좀 알고 대화나 이어가 보자는건데."
"왜?"
"내가 그놈의 왜 쓰지 말라그 흤즈.. 뭐 좋아하면 더 알고싶고 궁금하고 그러니까 그러겠지!"
예림은 소리를 빽 지르더니 짜증스럽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해연 입사시험에 압박면접 도입할 예정이라 나한테 먼저 실험중이냐? 내가 애사심이 넘쳐서 말해주는건데 이거 하면 압박면접 아니고 사생활침해면접이야. 다음 만남은 신입사원 환영회가 아니라 민사법원에서 원고와 피고로 마주치게 될거라고. 해연의 충격적인 면접 실태! 이런 기사 나서 김하연 법무팀장님이 뒷목 잡고 넘어가는거 보고 싶어서 그래? 종알거리던 예림의 말을 유현이 멍하게 끊었다.
"..나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뭐?"
"...그냥 네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줄은 알아...?"
유현이 여지껏 본 것 중 가장 바보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도 잘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동시에 유현이 놀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예림의 얼굴이 사과익듯 서서히 벌개졌다. 예림이 벌떡 일어났다.
"나 갈래."
"잠깐만."
"악, 옷 놔!!"
"네가 내가 너 좋아한다고,"
"아악 내가 언제 그랬어!! 아저씨!! 한유현이 미쳤어요!!!"
다급히 달려온 유진이 예림에게 유현이 저주나 상태이상 상태가 아니라고 납득시키는데는 약 반나절이 걸렸다.
예림과의 작은 소동이 일어난 후, 몇 권의 연애서적과 주변으로부터의 믿을만한 조언 끝에 유현은 그 날의 고백이 썩 적절치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현으로서는 그 고백이 본인도 모르다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나 다름 없었으니 어쩔 수 없긴 했다. 하지만 유현은 분명 예림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림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유현 스스로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감정을 먼저 잡아채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 그러면 유현은 그제서야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좋다' 정도의 막연했던 감각이, 사실은 번거로운 짜증스러움이나 은은한 설렘 따위의 감정으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림은 유현의 안에서 끄집어놓은 감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이 불여우야."
표면에 물이 송골송골 맺힌 맥주캔을 든 예림이 투덜거렸다. 내용만 뿌루퉁하지 말투에서는 숨길수 없는 행복감이 묻어난다. 선선한 공기가 머무는 초여름 밤 아래서, 검푸른 한강은 몸 안에 도심의 불빛을 별처럼 담은 생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바다와는 다른 강 특유의 물기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깔끔하게 재단된 돌계단에 걸터앉은 예림이 괜히 허공에 발을 굴렀다.
"무슨 쥐 잡냐? 좋아하는 거 잔뜩 가져다두면 나올 줄 알고."
"그래서 나왔잖아."
"조용히 해..."
어쨌거나 한강에서 육포ㅡ물론 유명우가 만든 것이었다ㅡ에 맥주 한 잔 하자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나온 것은 사실이니 할말이 없었다. 같은 속성이라는 사실이 안정감을 주는지 예림은 큰 강이나 바다를 앞에 두면 유달리 풀어지고는 했다. 고양이처럼 나른한 만족감이 얼굴을 떠돈다. 반대 속성인 유현으로 말하자면...
"넌 안 불편해?"
"응."
신기할 정도로 거부감이 없었다. 물가에서 물을 다루는 S급 헌터와 겨우 다섯뼘 남짓 떨어져 있는데도 마음이 편하다. 순전히 함께하는 사람이 박예림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는데. 어긋난 투닥거림과 수많은 농담들을 건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신뢰와 애정으로 등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함.
그럼에도 유현은 아직도 예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일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이 아니라, 하등 쓸모가 없을 사소한 취향들이 궁금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이유들이 궁금했다. 함께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인지가 궁금했다. 이전에는 모르는지조차 몰랐던 예림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도드라진다.
"내가,"
예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먼저 말을 꺼낼줄은 몰랐던 유현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내가 왜 좋아?"
직구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참 예림답다. 그것이 좋아서 유현은 이유를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네가 궁금하다는 말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유현도 알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타인들은 유현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대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 같았다. 왜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지, 왜 손해가 될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자신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늘어놓는 아무런 정보값 없는 대화들로 사람들이 어떻게 친밀해질 수 있다는건지 유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유현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암기했다. 맞는 사람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형이 그래야 한다고 했으니 싸우지 않았고, 누군가의 안도하는 얼굴이 기뻐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선행을 행했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주변 길드원들에게 안부를 묻고 사소한 취향들을 기억하는 것이 길드 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기에 그렇게 했다.
그러니 사실은, 예림에 대한 것도 궁금할 이유는 없다. 여태껏 해오던대로 암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네가 드로시아에서... 나한테 힘들었겠다고 말했잖아."
"드로시아? 그 일본?"
그 때에 유현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사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당황스러웠다. 다음에는 좀 어이가 없었고, 그 다음에는...
'힘들었겠다.'
비슷한 맥락의 말을 들어온 적은 많았다. 주로 몇 주씩 지속되는 던전 공략을 마친 후에 석시명에게, 귀찮을 정도로 오지랖이 넓던 문현아에게, 공략을 함께한 팀원들에게도 들었다. 그 중 상당수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었고, 나머지는 몇 퍼센트 정도의 걱정과 염려를 담고 있었지만 유현은 그것을 인간관계에서 으레 건내는 안부인사 정도로 여겼다. 물론 유진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기쁘고 기꺼웠을지언정, 그 말이 거대하도록 무거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몇 번이고 가볍게 들어오던 말이 몇백 톤의 무게를 가진 추처럼 가슴 한 가운데 쿵, 하고 떨어진다.
'나도 그런 기분 좀 아는데, 숨이 콱 막히더라.'
알긴 무엇을 안단 말인가. 유현과 예림이 겪은 일은 대상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며 상황도 달랐다. 형을 잃었을 때 그대로 숨을 멈췄던 자신과 달리 예림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죽지 않았다. 유현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위로받는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문제 해결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어쨌거나 고통을 느끼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남에게 말한들 자신의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있는 법이다. 그러나... 유현은 더듬더듬 감정을 꺼내놓았다. 아팠어. 숨이 안 쉬어졌고.. 죽을 것 같았어. 입으로 꺼내고서야 스스로가 그렇게 아팠음을 알았다.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해 보였던 고통이, 말로 꺼내는 순간 단어를 통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 같았다.
'고생했다, 한유현. 안아줄게.'
말한다고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상황이 오면 유현은 또 비슷한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네 마음이 어땠는지 나도 안다고 말하는 예림을 보며, 유현은 가슴을 짓누르던, 숨막히던 괴로움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이유는, 이해가 고통을 줄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힘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도. 유진의 옆으로 안겨드는 예림을 보며, 유현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평범한' 위로를 받았음을 깨달았다.
"나도 같은 걸 주고 싶으니까."
네가 있는 것이, 네게 이해받은 것이 위로였으므로. 나도 너에게...
예림은 뜻밖의 대답에 놀란듯 잠시 유현을 보았다가, 강을 보았다가, 다시 유현을 보았다. 마주앉은 두 사람 뒤로 물이 흐르는 소리, 유람선이 동동거리는 소리, 여름밤의 청명한 개구리소리, 밤산책을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흘러간다. 머뭇거리던 예림이 파란 매니큐어가 발라진 새끼손가락으로 유현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유현이 그 손을 맞잡았다.
*
그러나 그 위로가 다시 고통이 될 줄은 몰랐지. 유현은 답답한 기분으로 깨어놨다. 예림이 죽은 날부터 둔탁한 무언가가 명치에 얹힌 것 같았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이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고통은 잠시 가라앉기는 할지언정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오늘은 아이에게 가봐야 했다. 유현은 이미 며칠을 허비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반복하다 하루에 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을 넘겨버린 탓이다. 꿈은 늘 유현이 기억대로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순간 억지로 닫히며 주인을 밀어냈다. 그렇게 깨고 난 후 잠들면 그날 꾼 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알면서도, 유현은 매번 무의식중에 예림에게 손을 뻗거나 안으려 드는 것이다. 현실은 색채를 잃고 납작해져 가는데 꿈 속에서 기억하는 것들만 빛나 유현은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렸다. 유현은 자조하듯 웃었다. 어느 쪽이 꿈이고 현실인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현은 그냥 예림이 존재하는 곳에 있고 싶었다. 깨어나서 맞이하는 적막이, 적막이 알리는 예림의 부재가 끔찍했다. 신입이 준 정보만 아니었다면 수면제를 먹고 하루종일 꿈만 꾸며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현은 유현의 현실을 되찾아야 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주차된 차의 시동을 건다. 각성 후에는 거의 느껴본 적 없는 두통이다. 구불구불한 국도를 한 시간쯤 달린 차는, 서울 외곽의 어느 낡은 건물 앞에 멈춰섰다.
"어서오세요! 오늘 봉사 오기로 하신 분 맞죠?"
앞치마를 걸친 직원이 거의 맨발로 뛰어나왔다. 전투로 인해 고아는 몇 배씩 늘어난 반면 아직 국가기능은 다 복구되지 않았으니, 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지. 원래도 허름했을 건물이 여기저기 금이 가고 파헤쳐진 광경을 힐끗 보며 인식방해안경을 착용한 유현이 사람좋게 싱긋 웃었다.
"아이를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네요."
"어휴,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때가 때이다 보니, 다들 자기 생활 챙기기도 바빠서요... 실상 직원의 반가운 태도는 직접 봉사를 온 유현의 노동력보다도, 오기 전 선뜻 기부한 거금 때문일 터였다. 원활한 정보수집을 위해 돌아가면 돈을 조금 더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현이 마당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유현이 찾던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 인원이 다인가요?"
"아니요, 반 정도에요. 야외활동은 자율이라 안에 머무는 아이들도 있어요. 봉사자분께서는 어린 아이들 목욕이나, 부상을 입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아이들의 거동을 도와주시게 될 거에요."
"그렇군요. 서툴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직원은 이 시국에 돈을 척척 내놓는데다 성실해보이는 청년에게 감탄하느라, 유현의 시선이 창문을 샅샅히 훑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유현의 눈빛이 세 번째 방 안에서 길게 머물렀다. 다리에 가벼운 반깁스를 한 아이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낭패감을 숨기고 유현이 느릿하게 물었다.
"다친 아이들은... 계속 안에만 있나봐요."
"아, 그렇죠. 그래도 저희 시설에는 심한 부상들은 없어서요. 의사 말로는 제일 긴 아이도 3주?"
직원이 활짝 웃었다.
"꾸준히 와주시면 아이들이 건강해지는 모습까지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좋지 않은데. 아이는 자연스레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야 했다. 그러려면 밖에 나왔을 때 죽이는 것이 가장 안전한데... 시끄러워져도 바로 처리할까 잠시 고민하던 유현은 그 계획을 폐기했다. 문현아의 말대로 살아난 예림이 조금의 의혹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예림의 웃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은 유현이 따라 웃었다.
"그렇죠. 뭐든 여유를 가지고 길게 봐야 하니까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