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밤의 꿈
박코코 @coco_being
* 공식 설정에 없는 부분을 자의로 지어낸 내용이 있습니다. (가족사 날조)
이후의 원작과 다를 수 있습니다.
0.
“아저씨, 저 S급 장비 떴어요! 이거 봐요. 멀리 있어도 얼굴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손거울이래요. 던전 안에서도 통한대요!”
“장하다 우리 예림이! 그래도 일단은 빨리 가서 밥부터 먹자.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놀랐잖아. 특별히 문제 없었지? 다친 데도 없고?”
모든 일의 발단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서울 근교의 낮은 산에 새로 열린 던전은 공략 조건이 하나 있었다. '3인 이하의 구성으로만 진행 가능'이 그것이었다. 던전이 나타나고 시간이 흐르며 자잘한 조건이 붙은 던전도 드물지 않게 나타났기에 헌터들은 당황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다. 던전의 패턴을 분석하던 석하얀 팀도 'A급 중하위 정도? 크게 어렵지 않을 거에요. 던전 환경은 나무가 많은 산일 테고요.' 하고 예측했었다. 다만 브레이크까지의 시간이 촉박했고, 공략 일정에 여유가 있는 A급 이상 헌터들 중 손발이 잘 맞을 법한 헌터들을 찾다 보니 두 S급이 당첨되었을 뿐이었다.
한유현과 박예림. 둘 모두 비행이 가능하고 손발이 잘 맞으며 산 환경의 던전을 공략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랬기에 유진마저 별다른 걱정 없이 잘 다녀오라 손을 흔들었다. 예림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첫 공략이니 좋은 아이템 나오겠죠? 다녀올게요! 하며 따라 손을 흔들었다.
2.
어?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던전이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사슴 닮은 몬스터를 잡다가 피가 튀어서 씻는다고 물을 조금 끌어왔다가. 그 다음에 뭘 했더라? 예민한 기척에 온갖 자잘한 소리와 찬거리에서 풍기는 냄새가 코를 스쳤다. 예림이 자리에서 퍼뜩 튀어올랐다. 무슨, 한유현은 어디갔, 어…? 말은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비산했다. 보여서는 안 될 것이 보였다. A급 던전에서 SS급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 만큼.
익숙하고 그리운 방이 눈앞에 있었다. 화사한 하얀색 사이 포인트로 파스텔컬러가 들어간 가구들, 화사한 하늘색 벽지와 침구. 얇고 보송한 이불에서는 자스민 향이 났다. 내 이불에서 이런 향이 날 리가 없는데. 예민한 후각이 곧장 이상을 감지했다. 그들이 함께 머무르는 집은 무향에 가까웠다. 유현이 강한 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림은 어머니가 자주 쓰던 A사의 자스민 향을 좋아했지만 구태여 그걸 사오진 않았고 자연스레 집은 옅은 섬유 냄새만이 머무르곤 했다. 이상함을 느낀 몸이 튀어오르듯 자리를 박찼다.
그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익숙하고 그리운 풍경이지만 존재할 리 없이 낯설기만 한, 그녀의 방이었다. 방문에 걸린 달력에 이것저것 체크된 일정들이 보였다. 여름의 마지막 달. 던전 공략, 소영 언니와의 약속, 엄마 생일.
기세좋게 일어난 것 치고 예림은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기만 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조금 바뀌고 방에 TV가 새로 생긴 것 정도를 빼놓는다면 방 안은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때와 똑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두 눈만 깜빡이는데 문 너머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딸! 빨리 나와, 지금 밥 먹어야 안 늦게 도착하지!”
“여보는 또 무슨. 예림이 날아서 가면 해연까지 5분도 안 걸린다구요. 애 아침잠 많은 거 알면서 왜 깨워. 더 자도 돼, 예림아.”
…?
어안이 벙벙한 예림이 머뭇머뭇 방문을 열었다. 선명한 시야에 잡히는 것은 마지막으로 본 것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멍한 와중에도 몸은 익숙하게 척척 움직여 제 자리에 앉았다. TV가 잘 보이는 의자가 그녀의 자리였다. 에그팬을 사용해 하트모양으로 부쳐진 계란이 접시에 담겨 그녀의 앞에 놓였다.
“일단 밥은 먹고 더 자든가 해연에 가든가 해.”
“….”
“우리 예림이 많이 졸리니? 애가 던전을 꼬박꼬박 다니더니 몸이 허한가… 한약 달여놨으니까 밥 다 먹고 약 먹고 학교 가야 돼."
“양치도 하고. 우리 공주님.”
극도로 끌어올려진 감각이 이상을 단박에 잡아냈다. 생각에 뿌옇게 끼어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걷혀들었다. 그녀는 한유현과 단둘이 던전 공략에 나섰고, 손쉽게 몬스터들을 잡으며 정상까지 향하다가… 트랩에라도 걸렸나. 혹은 이것 자체가 던전의 최종 보스인 모양이었다.
‘엄마랑 아빠가 해연을 어떻게 알아? 거짓을 꾸며내려면 좀 그럴듯하게 하던가.’
이건 꿈이다. 던전이 보여주는 환상이겠지. 예림이 멍하니 제 앞에 놓인 반찬들을 보며 생각했다. 환상을 통해 헌터들을 잡아먹으려 드는 던전은 흔하진 않아도 간간히 있었다. 아마 이 던전이 A급이고, 그녀의 정신력 스탯이 S급들 사이에서도 특출났기 때문에 이상을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정신력 스탯이 높아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꼼짝없이 던전 안에 갇히기 부족함 하나 없지 않나.
‘아. 나물 질겨…. 엄마는 대체 왜 철 지난 여름에 고사리를 하시는 거야.’
이것까지 기억 속 그대로일 필요는 없잖아. 트랩이 허술하다 투덜거리는 소리는 입안의 쌉싸름한 맛과 함께 사라졌다. 거짓인 걸 정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예림이 많이 피곤하니? 엄마가 대신 연락해줄까? 귀하신 내 딸래미가 하루쯤 쉬겠다는데 어쩔거야.”
“아, 아냐. 괜찮아.”
“괜찮기는. 길드장이 어쩌구저쩌구, 한유현이 어쩌구저쩌구 매일 투덜거렸으면서.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해. 우리 예림이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위치잖니.”
“에이 여보. 너무 감싸기만 하면 안된다니까. 들어보니 저번에도 예림이가 보고서 양식을 아주 엉망으ㄹ… 예림아?”
가히 폭력적이도록 행복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박예림은 이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았다. 목을 넘어가는 밥알이 까끌거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2.
길드장실은 고요한 적막으로 뒤덮였다. 유현은 까만 만년필을 쥔 채 당장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 던전의 주된 공략은 ‘환상의 파훼’일 것이다. 어쩐지 A급 중하위 던전 치고도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만난 몬스터들의 급수가 죄다 낮았다. 난이도를 올리는 요인이 몬스터가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클리어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보스가 보여주는 환상에서 벗어난 후 보스를 죽일 것, 혹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여 던전을 나갈 것. 두 사람은 보스의 흔적조차 본 적이 없으니 이 던전은 후자일 터였다. 조건은 누가 봐도 뻔한 내용이거나 던전 내부에서 쉬이 힌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랬기에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높아봐야 A급 하위로 배정되었다. 유현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꾸며낸 환상임을 알았고, 어서 밖으로 나가 형과 저녁이라도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정신력 스탯은 각종 환상에 저항하는 능력이 있으니, 그가 알아차린 환상을 예림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얄밉지만 정신력 스탯 하나만큼은 예림이 그보다도 뛰어났으니까. 가만히 기다리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유현이 그렇게 결론내린 딱 그 시점이었다. 다소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생각할 때쯤 문이 열렸다.
“어, 어…. 그니까. 길드장놈님. 좋은… 아침?”
예림은 거짓말을 할 때면 왼쪽 새끼손가락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고, 별 말을 하지 않은 지금 벌써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앞으로 하는 말에 거짓말이 아주 많이 섞일 거라는 의미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손쉽게 들통날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할 예정이었으므로.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아침이야. 박예,”
“오는 길에 석시명 아저씨한테 던전 보고서 제출했어. 그, 지난주에 한강 다녀온 거.”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예림이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유현의 미간은 점점 더 구겨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림이 지난주에 진짜 다녀온 던전은 경기도 외곽의 호수 던전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여러 번 공략된 터라 특별히 보고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보고서를 아무도 못 알아보게끔 작성하기로 유명한 예림의 성향까지 더해져 호수 던전 보고서는 예림의 팀에 속해있는 보조계 헌터가 간략한 사항만을 작성해 제출하곤 했다. ‘얘가 환상인 걸 눈치 못 채고 꿈이라도 꾸고 있나?’의심하기에는 거짓말하는 모양새가 몹시도 티가 났다.
분명 알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그럼에도 왜 저런 태도를 유지하는가? 유현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 클리어하기 싫냐’ ‘그럼 최초 공략 보상은 내가 다 먹는다’ 하고 표정으로 말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정이 있으니, 일단은 이야기라도 들어볼까. 더 해보라는 듯 까만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 다음 주에 잡혀있는 일정에선 빠지면… 안 될까? 어차피 A급 던전이라 내가 없어도 될 거야. 팀원들에게도 연락해서 물어봤어.”
“그건 갑자기 왜?”
다음 주에 잡혀있는 일정이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원래대로라면 다음 주엔 셋 모두 공식적인 일정이 없었다. 늦은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었지. 유현이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여 예림의 일정을 찾아냈다. 이놈의 세계는 뭐가 이렇게 허술한지 서류에 쓰여진 던전은 알아보라고 광고하는 수준이었다. 서울 근교의 A급 던전? 그들이 입장한 던전과 정확히 같은 조건이었다.
중요하지 않다 이건가? 못 알아보는 게 더 멍청한 거 아냐? 이걸 공략하기 어렵다고 저항 스킬 달린 장비 챙겨서 가는 놈들은 뭐야. 지극히 그의 기준에 맞춰 투덜대고 있노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엄마 생신이라.”
예림은 그저 ‘안 돼?’하고 덧붙였을 뿐이지만, 유현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입술이 ‘제발’이라고 움직이는 걸. 예림은 잔뜩 불안한 얼굴이었고, 버릇대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지분거렸으며, 시선은 미약하게 떨렸다.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이 봐도 무언가 속내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모양새였다. 그것도 아주 안 좋고 우울한 속내를 감추는.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예림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환상 속의 거짓 일정’에 대한 거짓말을. 말인즉 이 공간 자체가 환상이라는 걸 알아차린 상태다. 그럼에도 어째서, 바로 나갈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장난질에 놀아난단 말인가? 스스로 거짓말까지 덧붙여 그를 속이려 들면서? 심지어 속지 않을 거란 사실을 예림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하루 이틀을 함께했던가. 예림은 원래도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유현은 타인에게 관심 한 푼 없으면서도 예림의 표정만큼은 확실하게 읽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토록 연약한 얼굴을 처음 보았다. 예림은 늘 그에게, 똑 부러지게 말하고, 쏘아붙이고, 커다랗게 웃었다. 가끔 소소하게 다투더라도 금방 훌훌 털어냈다. 지금처럼 톡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눈망울로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유현은 마땅히 좋은 대답을 골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드장으로서의 무난한 대답을 택했다.
“개인적인 이유를 다 들어줄 수는 없어.”
“우리 팀원들 수속성 저항 아이템도 있고, 수중 장비도 충분해. 팀원들이 가능하다고, 쉬어도 된다고도 말했고.”
“박예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던전 공략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일정으로 바꾸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바로 튀어나온 걸 보면… 공략 조건이 저 던전의 클리어 혹은 클리어 시도일 가능성이 컸다. 미궁의 입구와 출구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 않나. 여기에서 이상을 눈치 채고 던전을 공략해야 클리어가 될 것이고, 다른 이유로 미뤄버리거나 공략하지 않고 어물쩡 넘어가면 계속 갇혀있는 구조일 터였다.
“다음 주 일정은 서울 근교에 있는 산 환경의 A급 던전이야. 알고도 가기 싫어?”
“….”
이러쿵저러쿵 이유를 덧붙이며 너무하다느니, 특별 연차라도 쓰게 해 달라느니 말할 법 한데도 예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저것도 정신력 스탯이 꽤 높게 달린 아이템이었지. 시선이 잘그락거리는 팔찌에 닿았다가 눈을 마주했다.
“대신 다음 번 보고서는 좀 제대로 써.”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인어, 햇빛에 바싹바싹 말라 빛을 잃어가는 창백한 낯빛, 당장에라도 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 같은 예림의 얼굴. 유현은 그토록 새까만 예림의 눈동자가 낯설었다. 그늘진 눈동자 아래 담겨있는 건 퇴적물이 잔뜩 쌓인 심해였다. 그가 모르는 예림의 조각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깊은 바다. 차분히 가라앉은 수면은 예림이 그녀의 속내를 꺼내지 않기 때문에 잔잔해 보일 뿐이었다. 그 아래에 뭐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거면 돼?”
“응? 뭐 어디 가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응. 선물만 드리고 밥만 먹을 거야.”
“더 말하고 싶은 건 없어?”
이 던전에 대해서라던가, 할 말 없어? 소리가 되어 던져진 질문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였다. 여전히 새끼손가락을 만지작대던 예림이 탁. 소리와 함께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기왕 허락해준 김에 그럼 하나만 더! 나 그거 빌려줘. 인식 흐리게 하는 스킬 걸린 발찌. 나 쇼핑하러 갈 건데 얼굴 알아보는 사람 많을 것 같아.”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이 짠돌이! 뭔데?!”
“나도 같이 가.”
3.
예림은 가끔 후회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그 때에 나는 좀 더 강해지지 못했을까. 말간 시선이 허공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쫓았다. 그녀 탓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주위의 어느 어른을 붙잡고 이야기해도 네 탓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할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어디 이성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던가?
어차피 S급으로 각성할 거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 날 브레이크가 터진 곳은 고작해야 B급이었다. 내가 막을 수 있었겠지. 헌터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각성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왜 나는 그때 힘없는 어린아이로만 남아있었던 거야? 어째서? 나는 S급이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터였다.
이곳은 아마 그녀가 최초로 겪은 던전 브레이크에서 각성했음을 바탕으로 한 환상이 아닐까. 몇 번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있으니 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세상이 꼭 조리개가 덜 닫힌 카메라처럼 두 눈에 담겼다. 예림 정도의 실력이라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만큼 조악했다. 큰 의미가 없이 지나가는 것들은 자세히 보려 해도 뿌옇게만 보이고. 사소한 것들은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글자들로 채워졌다. 아니, 그런 부분까지 구현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흐트러지는 풍경만으로도 예림을 꽉 붙잡아두고 있으니까.
수면 아래에 잠겨 바깥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죄다 일렁거리고, 불명확하며, 왜곡되어 보이는 풍경이 그랬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물 속에서 호흡까지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숨이 차오르지 않는 동안만이라도. 숨이 차면, 던전 클리어가 촉박하다 느껴지면 바로 나갈 테니까, 조금만 봐 줘. 유현은 예림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까만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때 각성했다 한들 나쁜 결과가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쪽이 부모님을 더 걱정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림은 오래 우울에 잠겨있지 않기로 했다. 와, 엄마랑 아빠가 날 이렇게 잘 낳아서 키워주셨는데 이깟 거 클리어도 못하면 얼마나 황당해하실까! 아저씨도 미안하다며 발을 동동 구를 테고 안 그런 척하는 한유현도 엄청나게 신경쓸 게 분명했다. 꿈에 오래 잠겨있지는 않을 테니까.
4.
늦여름의 마지막 장마라도 되는지 며칠 내도록 비가 내렸다. 웃기고도 괴상한 점 하나는 예림의 폰으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유진의 문자였다. ‘예림아 비 오니까 창문 닫고 자’ ‘우산 가지고 다녀’ ‘늦잠 자는 건 괜찮지만 아침은 먹고!’
여기서까지 이런 걱정이라니. 금요일 저녁에는 유현이 보낸 카톡도 도착했다.
[ 내일 오후 한시까지 나와. ]
‘ㅇㅇ’하고 단문을 보내려던 예림은 그 대신 기상천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수락하는 의미의 이모티콘이긴 한데, 또래에 맞는 문화와는 백만광년쯤 떨어진 길드장놈님이 이걸 알아볼까? 예상과 다르지 않게 곧 도착한 답장은 ‘?’였다. 그게 또 조금 우스워서 예림은 실없이 깔깔거렸다.
5.
한 가지 신경쓰이는 건. 모든 배경이 놀랄 만큼 ‘박예림’ 하나에게 맞춰져있다는 점이었다. 효도중독자들이 그녀를 노렸나? 하지만 지금에 와서 S급인 예림을 노린다는 선택지는 이득도 가능성도 낮았다. 게다가 평범하게 나타난 던전인데? 예림이 덥다며 산 정상의 호숫물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홀라당 뒤집어쓰기라도 했나?
명석한 두뇌는 오래지 않아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던전은 ‘간절히 바라는’ 꿈을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달콤한 꿈속에 빠져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혹 구분한다 한들 빠져나가기 싫을 만큼 달디단 꿈을.
그리고, 그리고 한유현은… 그런 꿈이 없었다. 예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이유가 아마 그것이겠지. 해연은 어엿하게 대한민국의 대표 길드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그의 형과는 화해하다 못해 전보다도 더 친밀해진 지 오래였으며, 그 나름대로 믿고 곁을 맡길 수 있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그 시점에서 한유현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생길 리 만무했다. 이어지는 일상은 평화롭고 아늑하기만 했다. 바라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 무엇도 간절하지 않았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 말하자면. 소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느 때를 보냈던 거였다. 한유현 혼자서. 그 사실이 뒷목을 서늘하게 내리쳤다.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오싹함이었다.
괜찮은 줄 알았다. 마냥 즐거운 줄 알았다. 이런 말은 변명이고 회피일 뿐일까? 하지만 유현은 정말 그리 생각했었다. 그들 형제는 가장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던 시절 내내 부모의 울타리 바깥에 있었다. 자연히 그 아늑함도 애정도 몰랐다. 한유현이 인식한 최초의 애정은 그의 형에게서 시작된 것이었고, 유진은 예림도 더없이 아꼈다. 그러니 된 거 아닌가? 정말로 그리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박예림은, 그 애는 그들과는 달랐다….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 빈자리는 그가 채울 수 없는 걸까? 한유현은 그의 형과 박예림만으로도 세계를 빈틈없이 채울 수 있는데.
6.
뉴스에서는 분명 비가 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유현이 가져온 접이식 우산 두 개를 가방에 넣었다. 일기예보가 엉터리인지 아니면 예림의 기분이 들쑥날쑥인건지. 예림은 발걸음도 가볍게 가방 하나 우산 하나 챙기지 않은 채 타박타박 걸어왔다. 마치 유현이 당연히 준비해 왔으리라 믿는 태도였다. 그게 맞아서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익숙한 보폭으로 그녀를 따라 거리를 누볐다.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건강보조식품들과 이것도 국산으로 재배된다고? 싶은 것들을 지나 예림은 그녀 어머니의 취미라며 희귀한 화분 사이를 누볐다. ‘집에서 말라 죽은 선인장이 몇 개였더라?’ ‘그런 점은 하나도 안 닮았나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따라다니자니 짐꾼 노릇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적당한 타이밍을 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조금 한적한 거리에서 유현이 말을 골랐다.
“형이랑 나만 가지고는 모자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다른 사람이 그리웠던 거 아니야. 간절하게. 지금 이 던전이 구성된 것만 해도 그렇잖아. 현실과 달라진 것들의 초점은 대체로…”
유현이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언제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맹렬하던 불길이 오늘은 바람 앞의 촛불마냥 흔들려 보였다. 예림은 이게 정말로 무슨 뜻인가 싶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한유현은 물어보면 늘 돌직구로 대답해줬다. 기본적으로 조금 회전해 있어서 헷갈릴 뿐이지. 이럴 때는 물어보는 게 가장 빨랐다.
“미안하지만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진짜로 모르겠어.”
“네가 혹시라도, 힘들었다거나. 빈자리를 느낀다거나 했는데 나랑 형이 미처 몰랐던 거라면-”
“아.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예림이 슬그머니 눈꼬리를 휘었다. 햇살을 받은 물결마냥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대로 반달처럼 휘어지더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너 혹시 내가 우울하거나 땅 파고 있었는데 눈치 못 챘다거나 해서 미안하다 뭐 이런 말 하려는 건 아니지?”
“….”
“물론 네 추측대로 가끔 보고 싶기야 했지. 하지만 그건 너랑 아저씨 문제가 아니야. 부모님이야 원래 늘 보고 싶은 존재인 거라고.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해연 길드장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 말에 유현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에게 부모님은 든든한 울타리인 적이 없었고, 보고 싶은 존재로 기억된 적도 없었으므로. 더 본질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더 필요해?”
“와 한유현 또 핀트 나간 소리 한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임을 직감한 예림이 가까이 보이는 벤치에 달려가 앉았다. 옆자리를 톡톡 두드려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서 살랑살랑 다리를 흔들었다. 종종 한유현의 이런 면모를 알게 되곤 했다. 뭐,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 너랑 내가 다른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유현은 그러니까…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그립다는 그 사실 자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여간 아저씨만 멀쩡하면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아무렇지 않아 할 놈 같으니라구.
“이해하기 힘들면 그렇게 생각해. 모카프라푸치노 먹으면서 망고빙수 먹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게 프라푸치노가 맛없어서 하는 생각이겠어?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니까 그렇지.”
평상시였다면 그건 네가 돼지라느니 어쩌느니 했을 유현이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뭐야 얘 정말 나한테 미안했나 봐. 그치만 어떡하지. 길드장놈은 여기서 달라진 게 전부 그녀 위주인 줄 알고 미안해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너도 나름 간절한 거 있었나보더라. 돌아가면 뉴스기사 좀 검색해봐. 연예기사 쪽이 좋겠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남겼다.
7.
한유현은 정말로 그의 형과 박예림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 게 뭔가. 아쉬울 수는 있어도 간절히 그리워할 일은 없다. 예림은 꽤 자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거기다 부모님을 꽤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한유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예림은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기억하기로 했다.
‘왜 자꾸 땅을 파. 나 얼마 전에 S급 장비도 하나 얻어서 기분 완전 좋거든! 우울한데 좋은 척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데 한 번씩 생각나는 거 뿐이라고!’
8.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 어느덧 공략 예정일이었다. 큰 준비는 필요없을 테니 괜찮겠지. 유현은 공략팀보다 한 발 먼저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공략팀이래봐야 던전이 만든 환상일진데, 그들이 공략하게 내버려뒀다간 영원히 클리어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를 일 아닌가? 위험부담은 최대한 적은 편이 좋았다.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빨랐다. 굳이 챙길 필요도 없는 공략장비 대신 과일과 케이크를 사서 예림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예림의 집은 역시나 상상과 비슷했다. 몇 가지 보안장치가 되어있긴 했지만 세이프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곳에서 사는 몇몇 헌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실은 하얀색을 기조로 군데군데 파스텔 컬러가 들어간 형식이었다. 해연 기숙사와도 그들의 집과도 많이 다른 색감이었다. ‘이런 거 취향이었나?’ 생각해보니 방도 꽤 밝게 꾸몄던 것 같다. 기본적인 골조가 있어 이렇게까지 화사해지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놓인 작은 화분들이 정겨움을 더하고. 집 전체적으로 꽃향기가 맴돌았다.
“역시 왔네. 조금만 기다려봐. 나 금방 나갈 테니까.”
“던전 공략하러 가자고 할 건데도?”
“당연하지. 클리어는 해야 될 거 아냐. 나도 알아.”
그럼 그 때엔 왜 그랬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방문에 걸린 달력은 이런저런 기념일이 표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죄다 뜯겨나간 상태였다. 유현은 재촉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 외엔 지금 그들이 함께 사는 집과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화분이야 어차피 기르는 족족 죽여버리니 어쩔 수 없는 거고, 남은 건…
“이거 무슨 향이야?”
“자스민. 왜? 맘에 들어? 의외다.”
“네가 좋아하나 싶어서.”
그러자 방 안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 설마 또 삽질하는 거 아니지? 나 상쾌한 향이나 가벼운 거 좋아해. 이런 꽃향기는 내 취향 아니야.”
9.
“그런데 길드장놈님.”
“왜 불러.”
“넌 정말 나랑 아저씨만 있으면 돼?”
유현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여서 예림은 순간 얼굴이 빨개질 뻔 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멀리 가지 마. 나보다 먼저 가는 것도 안 돼. 네가 있어서 괜찮은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