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웨나 @2nd_rw
박예림은 세 번째 밤마저 꼴딱 새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짧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박예림이 겪었던 모든 악몽보다 더 심각한 꿈이었다. 박예림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보통 이런 경우면, 그런 경우지? 아무도 해석 못할 단어들이 나열되었다. 박예림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베개 옆에 놓여있던 올해 여름 시즌 한정판 바니바니베어가 박예림이 침대에 대고 일으키는 진동에 따라서 이쪽저쪽으로 흔들렸다. 1m짜리 인형이 침대 위에서 저를 따라 깜찍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예림은 그 작은 머리통을 돌돌돌 굴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저주나 상태이상에 걸린 것은 아닌지 자신의 상태창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수렴하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박예림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풀썩 누워버렸다.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지금까지의 상황과 직간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수백 가지의 방향을 생각해보았다. 사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조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개연성 있는 결론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박예림은 과거 부피의 존재를 발견했던 수학자가 했던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몸으로 온 집안을 뛰어다니지는 않았지만, 마룻바닥을 두 발로 디디며 낸 쾅, 소리는 집 안의 모두가 듣기에 충분했다. 유레카를 외치듯 박예림은 S급 헌터의 성량으로 집을 울렸다.
“돌았나봐!”
그리고 박예림은 그와 동시에 아래층에서 들려온 시끄럽다는 목소리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한유현은 요즘 박예림의 상태에서 이상을 감지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박예림이 더 이상 자신과 눈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시작된 일이었으니 한유현은 아주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 날은 한유현이 박예림을 데리고 식사나 하러 갈까 생각하던 날이었다. 사실, 한유현은 박예림에게 식사 자리를 한 번 마련해주고 싶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기는 했으나 결론만 말하자면 일단은 그런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위해서, 한유현은 서류 처리를 위하여 올라오는 박예림의 일정 계획을 몰래 기억해놓기도 했다. 그러니 그 날은 박예림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날이었는지 몰라도 한유현에게는 계획된 날이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나랑 밥 먹으러 가자. 담담하게 말했으나 한유현은 그 문장을 내뱉는 동안 박예림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박예림의 반응은 조금 떨떠름했다.
“너랑 나랑? 둘이?”
물론 한유현은 한유진도 당연히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말을 들으니 괜히 거부당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한유현은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형도 함께 가는 거지. 그 말에 박예림은 그럼 그렇지, 라고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 분명한 눈빛을 하며 잘 되었다는 듯 손뼉까지 쳤다. 한유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것은 박예림이 눈치 챌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날의 저녁식사 시간부터, 한유현은 박예림이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눈치 채지 못하려 해도 못할 수가 없었다. 박예림이 연신 어색하게 제게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유현은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속에서 하도 열이 오르니 연거푸 물을 들이마시다 못해 손에 쥐고 있던 스테인리스 물컵이 따뜻하게 데워지기까지 했다. 컵 안에 들어차 있던 찬물이었던 투명한 액체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한유현은 아무도 모르게 물컵을 내려놓았었다.
물론 한유현이 이렇게 열을 내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속 좁아 보일지 몰라도 한유현은 온 마음을 다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유현은 박예림을 좋아하고 있었다. 한유진에게조차도 털어 놓지 않은 비밀이었다.
한유진에게 말했다간 드디어 이 형도 혼주석에! 라는 감탄보다는 아이고 유현아! 하는 통곡이 먼저 나올지도 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유현과 박예림이 함께 보낸 시간이 깊었던 탓이었다. 박예림과 한유현이 한 집에 살게 된 지도 이제 8년이 넘은 채였다. 그 시간 동안 한유현은 쉼 없이 박예림과 다퉜고, 그러면서도 박예림을 인정했으며, 결국 박예림을 제 울타리 안으로 들였다. 한유현에게 있어 한유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었다면 박예림은 이제 정식으로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런 식의 어중간한 남매보다는 조금 더 질척한 감정을 가지고 엉겨 붙고 싶었다. 박예림을 보면 언젠가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하던 감정은 한두 해에 걸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한유현은 박예림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유현은 처음 제 감정을 알았을 때 기겁하고 박예림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려 했으며, 박예림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아무도 모르게 포기하기로 하자는 생각까지도 했으나, 바로 얼마 전 박예림이 외국에서 한국으로 관광을 온 프리랜서 헌터와 단둘이 사이좋게 놀러나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길드장실의 탁자 하나를 태워먹고 나서야 포기하기도 글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유현은 차라리 박예림을 꾀기로 했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3주 전의 일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박예림도 이제 성인이었으니까 자신에게도 면죄부가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바로 얼마 전부터 박예림의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유현이 박예림을 피해 다녔다면, 이제는 박예림이 한유현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박예림은 줄기차게 도망쳐 다녔다. ‘도망친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렸다. 한유현이 박예림에게 품은 감정을 부정해보겠답시고 박예림에게 일부러 시선 주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그때의 한유현은 박예림과의 만남을 피하는 데에 소극적이다 못해 반대로 박예림을 만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박예림은 이제 길드장실에 놀러오지도 않았다. 점심시간만 되면 밥도 같이 먹자고 순간이동으로 허공에 나타나 먼저 한유현에게 팔짱을 끼곤 했던 그 박예림이, 한유현을 찾지도 않고 있었다. 한유현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박예림이 좋아하는 것들로 선물공세라도 하면 기분이 좀 풀릴까. 화를 내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그러다가 한유현은 문득, 제가 가진 감정의 이름을 박예림이 알아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동시에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가망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한 번 의심을 시작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한유현은 제 자신이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가설을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한유현이 한유진을 아낀다는 사실을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만 보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한유현은 언제나 좋아한다는 감정을 삭일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것은 박예림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굴고 있으니 더더욱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유현은 침울해지다 못해 암담해졌다. 박예림이 거절의 말을 돌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유현은 제 감정과는 상관없이 무엇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가만히 박예림이 자신을 거절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일주일 정도 이루어졌을 때, 한유현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박예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탓이었다. 한유현은 박예림이 성장기 때부터 지금까지, 특히 유명우 헌터의 반찬이 식탁 위에 오른 날에는, 일이 있든 손님이 찾아왔든 상관하지 않고 두 그릇 이상의 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박예림의 식사량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슬금슬금 한유현의 눈치를 보면서 깨작깨작 밥을 먹었고, 한 그릇을 겨우 비우고는 배가 부르다며 먼저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밥상 앞에서조차 한유현을 피해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밥 한 공기를 더 먹느냐 마느냐로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라지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얼굴색이 다 죽어버린 퀭한 얼굴로 어색하게 저를 보며 미소 짓는 박예림을 보고 있자면 한유현은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을 수 없었다. 며칠이면 지나갈 줄 알았던 일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될 기미를 보이자 한유현은 더 이상 상황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박예림이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박예림이 건강을 챙기는 일이었다. 박예림에게 자신을 연애대상을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가떨어질지언정 박예림이 밥을 깨작거리며 먹는 꼴은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역시 한유현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도출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결국 한유현과 박예림은 소파에 단 둘이 앉아 있게 되었다. 한유진이 사업을 위한 담화가 필요하다며 세성길드로 간 덕에 만들 수 있게 된 자리였다. 박예림은 여전히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리고 있었으며, 한유현은 박예림이 자신에게 어색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가슴께가 무거워졌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갔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박예림의 어깨가 튀었고, 한유현은 박예림이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조차도 싫었다. 자신이 아는 박예림은 하염없이 빛나고 당당한 사람이기에, 한유현은 제 존재가 박예림에게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유현이 지금 당장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냐는 말을 공기 중으로 산화시키고 바닥을 파고들어가려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묶어둔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 한유현이 할 말은 온전히 박예림만을 위한 문장들이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 래서… 왜 사람을 여기 앉혀놨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얼굴로 박예림은 한유현을 바라보았다. 푹신한 소파 위에 앉은 두 사람이었지만 둘 다 긴장을 푼 자세도 아니었다. 한유현은 아예 박예림 쪽으로 몸을 틀어 똑바로 박예림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박예림은 도망칠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것처럼 끄트머리에 겨우 걸터앉았을 뿐이었다. 한유현은 툭툭 단어를 뱉는 대신 일단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피하는 걸 보니 신경이 쓰인다거나, 네가 밥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게 속상하다거나, 나를 피하고 싶었으면 나만 피하지 왜 식사까지 같이 피하는지 모르겠다거나. 하지만 한유현은 혹여 박예림이 다른 걱정이 있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으며 만일 그럴 경우 자신이 박예림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박예림에게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가설 하나를 머리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한유현은 현명한 사람이었고, 그 이전에 제 울타리 안쪽의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으니, 한유현은 머릿속의 전부를 털어놓는 대신 일부분만 슬쩍 공개해 보였다.
“뭐가 문제야?”
“시비냐?”
단숨에 도끼눈을 뜨는 박예림을 보며 한유현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해바라기 씨를 숨겼다고 화를 내는 조그마한 햄스터가 박예림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이쯤 되면 중증이었으나 한유진으로 인하여 칭찬에 수도 없이 단련된 한유현은 지금 제 생각이 문제가 되는지도 몰랐다. 귀여우니까 귀엽다고 하는 거지. 다만 한유현이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기에, 한유현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온전히 말을 이어갔다.
“너 요즘 얼굴색 안 좋잖아. 밥도 잘 안 먹고.”
“잘 먹는데.”
한유현은 대답처럼 중얼거리는 박예림의 목소리를 대충 무시했다. 식사량이 반으로 줄어든 사람의 목소리를 한유현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이내 잔소리가 조금 더 이어졌다. 밥을 제대로 안 먹으면 두뇌회전이 어쩌고 근력이 저쩌고. 박예림은 귀를 막고 싶다는 표정이나 지었다. 한유현 역시도 알아챘지만, 그 정도로 놓아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부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S급 헌터로서의 귀감을 운운하던 문장은 이내 음식물 쓰레기가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박예림이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야 한유현은 기다랗게 늘어놓던 문장들을 한 번 끊어냈다.
잔소리가 한 번 끊기자 박예림은 문장에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쭈뼛쭈뼛 할 말을 찾고 있었고, 한유현은 박예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잔소리와 잔소리 사이의 공백을 길게 늘였다. 사실, 그 핑계로 얼굴을 한 번 더 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박예림이 최근에는 도통 얼굴을 보여주려 들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박예림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한유현은 박예림과 쌓았던 추억을 머릿속에서 홀로 조심조심 꺼내보았다. 박예림은 한유현에게 조심스럽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멋대로 선을 넘고 들어와 손을 내밀어주었다. 처음으로 붙잡은 가족 아닌 타인의 살결이 불쾌하리라 여겼던 것이 우습게도, 박예림과 손이 맞닿았을 때 한유현은 제 세계가 고온건조한 기후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곧 세계가 거꾸러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래 놓고서, 이제 나를 놓으려고 해? 한유현은 자신에게 박예림이 소중한 만큼 박예림에게 자신이 소중할 수는 없으리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머리로만 겨우 이해했다. 띄엄띄엄 입을 열어가는 박예림의 모습이 제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으면서도, 그 물기가 너무 과해 박예림에게는 불쾌한 질척거림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한유현은 박예림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가? 한유현은 그 대답에 부정의 대답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차가운 얼음 안에 갇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저조차도 잃고, 영원히 무력한 채로.
“아니… 그게… 그렇게 막 걱정할 필요는 없고…….”
그리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한유현을 애써 무시하며 힘겹게 입을 열던 박예림은, 그야말로 미치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문제냐는 질문에 시비 거는 거냐고 반문했었던 이유는 박예림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음을 잘 숨긴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혀 아니었는지 한유현은 직접적으로 대답을 바라왔지만. 물론 한유현의 지적대로 박예림은 한유현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어려워서 후다닥 밥을 먹고 식탁에서 뛰쳐나가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문제가 뭐냐’는 바로 그 물음이 박예림의 머리를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했다. 박예림은 한유현에게 제가 감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매일 밤 꿈에서 너랑 데이트를 한다든가, 너와 스킨십 진도를 자꾸 나가고 있다든가, 꿈속에서 너는 늘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준다거나,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꿈 생각이 자꾸 나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겠다든가, 꿈과 현실을 혼동해서 너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할까봐 쉽게 다가갈 수 없다든가, 그 모든 상황들이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든가. 떠오르는 말들 중 어떠한 내용이라도 박예림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했다가, 차이면, 그걸로 끝장이잖아. 여기서 나가라고 할지도 몰라. 아저씨도 충격 받지 않으실까, 따지자면 자식처럼 키운 애가 자식처럼 키운 애를 좋아한다는 건데.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 들은 셈 치겠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그것도 충분히 마음 아플 것 같은데. 박예림은 한유현과 멀어지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다. 이별보다는 어색함이 차라리 나았고, 아예 평생 이 감정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마음먹고 친구나 남매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야 말로 감정이니까. 박예림은 부정적인 대답이 들릴 바에는 영영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을 택하려 들었다. 한유현은 이미 제 변화를 알아내 제 눈앞에서 답을 내놓으라고 묻고 있었다. 박예림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여름이잖아? 더워서 잠을 잘 못 자겠더라고.”
하하, 하…. 어색하게 웃음을 덧붙이며 박예림은 3초 전에 말을 마친 제 머리를 매우 세게 때려주고 싶었다. 더워서 잠을 못 자? S급 헌터가? 변명거리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더위 먹었냐는 말이 나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으며 그 전에 한유진에게 스킬에 문제가 생겼는지 봐달라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걱정에는 곧 초조함이 섞이고, 이어 자책까지도 샘솟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 저를 좀 구해주세요! 박예림은 가장 진실한 마음으로 속으로만 외쳤다. 아저씨, 현아 언니, 소영 언니, 명우 오빠, 노아 오빠, 소영 언니가 하루 빨리 분리수거를 바라는 세성 길드장님이나 아직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송태원 실장님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누구든!
그러나 사실, 솔직히 이야기하면 한유현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유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맥락은 박예림이 잠을 설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박예림이 그 이유를 무더위에서 찾아내었다는 것이고, 한유현의 스킬이 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냉방과 난방 중 더 자신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한유현은 물론 난방을 고를 것이었지만, 불을 다루는 사람은 누구든 그 불에게 상처 입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변명거리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한유현은 경악하다 못해 떡 벌어진 입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박예림을 향해 당연하다는 어투로 제안했다. 제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벼운 명령조에 가깝기는 했다.
“그럼 나랑 같이 자.”
“머?”
‘뭐?’와 ‘어?’의 중간 발음이 박예림의 입에서 새어나갔다. 한창 상황에서 벗어나가기 위해 현실보다 머릿속에 더 주의를 기울이던 중이었기에 한유현의 말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한유현의 말에 현실성이 없는 것 역시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박예림은 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휘둥그렇다 못해 아주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한유현은 직감적으로 박예림의 입에서 나올 다음 문장을 알 수 있었다. 너 어디 아프냐, 뭘 잘못 먹었냐, 너 한유현이 아니구나 등등. 나올 수 있는 현재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비정상적 상태가 아닌지에 대한 모든 물음을 가만히 들어주는 대신 한유현은 말을 덧붙였다. 대화의 두 주체인 한유현도 박예림도 몰랐겠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 다급하게 들리기도 했다.
“화염저항 공유해 줄 테니까 옆에 붙어 있어.”
박예림은 그제야 한유현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낸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한유현은 제 변명이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그 사이에 숨겨놓은 제 진심이 들키지 않았는지 고민했다가, 그 생각들조차도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든 제 마음은 편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박예림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볼 일 없을 테니 마음을 눈치 챘다면 제안을 거절할 것이었고,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면 자신의 욕심을 위해 박예림의 비정상적인 숙면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런 사랑을 하게 된 걸까. 한유현은 종종 이 마음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결국 한유현은 자기가 한 말을 돌이키지 않았다. 언젠가는 미움 받게 되더라도 지금만은 옆에 있고 싶었다. 한유현이 가만히 박예림의 대답을 기다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예림은, 머릿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격렬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예림은 한유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같이 자? 같이? 나 한유현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박예림은 이제 한유현이 고도의 기술로 자신을 농락하려 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소리내어 비명을 마저 지르려다가, 그 한유현이라면 농락은 고사하고 자신이 한유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아저씨밖에 없을 게 분명한데 나에 대해 뭘 알겠어. 평생 아저씨 꽁무니나 쫓아다닐지도 몰라. 그러나 전말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일들까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감각에 휩싸인다 해도 한유현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인, 형제, 친구, 반려동물을 대할 때마저 그 애정의 형태는 모두 조금씩 다르며, 그럼에도 그 전부를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는 한유현도 그걸 알 날이 있겠지. 그럼 나한테도 가망이…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티끌만한 가망이라도 붙잡은 채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박예림은 지금, 누가 보아도 연정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 그 자체였다. 가벼운 서글픔이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으나, 박예림은 자신을 찾아온 우울을 가볍게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도 했다. 박예림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입가에 작게 호선을 그렸다. 지금에서는 아무런 해결 없이 걱정만을 얹어주는 생각이었으니,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든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호전적인 어투였지만 한유현이 듣기에는 곱기만 했다. 한유현은 저도 모르게 박예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쩌면 팔을 벌렸다고 설명하는 편이 어울리는지도 몰랐다. 박예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한유현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발소리는 매우 작았다. 박예림은 어색하게 허리를 굽혔으며, 그 사이에 로맨스 기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한유현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이내 다이빙이라도 하듯 품 안으로 밀려오는 무게에 한유현은 ‘과유불급’이라는 흔하디 흔한 성어를 떠올리기로 했다. 다짜고짜 수압 높은 물을 틀어보았자 컵은 넘쳐흐르면서도 꽉 찰 때까지 물이 담기지는 않는 법이었다. 한유현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자고 다짐하며 박예림이 제게 전해준 무게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품 안에서는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팔에 박예림을 끌어안고 팔을 베게 삼아 머리를 받쳐주며 한유현은 차근차근 이 감정을 전해주자고 생각했다. 먼저 어른이었던 만큼 더 어른스러워지고 싶다는 마음의 일부분이었다. 꼼질거리는 박예림의 행동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화염저항 스킬은 패시브 스킬이니 가까이 있기만 해도 공유가 될 텐데, 한유현은 공유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마저 더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덥잖아, 사기꾼아.”
그리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박예림 역시 투덜거렸다. 차라리 내가 스킬을 쓰는 게 더 시원하겠다, 꿍얼거리며 내뱉더니 이내 손을 휘저었다. 단숨에 거실에 찬바람이 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 같은 냉기였다. 한유현은 찬바람이 피부에 닿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박예림은 의식적으로 바람을 한유현에게 닿지 않도록 조절했다. 거실 자체에 냉기가 돌고 나서야 박예림은 아차 잘못했다는 듯 한유현의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화염저항을 공유하는 의미가 없나? 박예림은 방금 자신이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뻥 차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한유현은 조금 더 박예림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을 뿐 박예림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박예림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조금은 어색하게 한유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기대도 되는지 아닌지 서른 번은 더 갈팡질팡 고민하고 난 뒤의 행동이었다. 한유현에게서는 아무런 제제도 없었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박예림은 무심코 헛기침을 했다. 일부러 한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나 그냥 이러고 있어?”
“왜, 못 자겠어?”
누워있기 때문일까, 반문하는 한유현의 목소리는 그리 박하지 않게 들렸다. 박예림은 잠시 곰곰히 따져보았다. 한유현이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나에게 별 감정 없다는 거겠지? 그렇지만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악감보다는 호감이 더 많지 않을까. 전처럼 아저씨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사이로만 생각한다면 나를 재우겠다고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박예림은 도저히 한유현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박예림은 꼬물꼬물 한유현의 품 안을 더 파고들었다. 끌어안은 따뜻한 불꽃은 향이 되어 다가왔다. 모닥불에서 느껴지곤 하던 은은한 불꽃의 냄새. 전해지는 온기는 수마를 품고 있었다. 박예림은 결국 한유현에게서 도망치기 위하여 취했던 행동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언제가 되었든, 제대로 된 때가 온다면 한유현에게 제대로 말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꿈속에서 네가 나에게 얼마나 상냥했는지, 너와 내가 어떤 눈길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그 말을 담담하게 내뱉기 위하여, 박예림은 한유현을 조금 더 꾀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 조금만 더 나를 좋아해 줘.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모르겠으니까. 한참을 한유현의 품 안에서 나른하게 풀어져 있다가, 늦게나마 박예림은 한유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졸려.”
박예림은 마음을 다잡았다. 결심은 섰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상대는 눈앞에 있었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언젠가는 전부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꾸었던 모든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몰라. 언제나 그렇듯 사랑에 빠진 사람은 희박한 확률이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상을 끌어안고 사는 법이었다. 박예림은 몰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박예림.”
자는 건가, 싶어서 불러보았더니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한유현은 제 품 안에서 곤히 잠든 이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러웠다. 한유현은 순간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가,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한유현이 박예림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좋아해’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나를 놓지 마,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줘. 내 세계를 떠나지 마.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함께 나와 함께 만든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만들지 마. 한유현은 이 마음이 사랑이라는 단어와 썩 어울리는 감정은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한유현이 박예림에게 가지는 사랑이 맞았다. 그 이름이 아니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겠지만 너를 놓고 싶지도 않다는, 차라리 집착에 가까운 생각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유현은 자신이 박예림의 강함에 기대고 있음을 알았다. 박예림은 자신을 멈추어줄 수 있었다. 언제든 햇살처럼 웃으며 저 깊고 어두운 지하에서 자신을 꺼낼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족쇄를 달아도 박예림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박예림이 박예림인 이유에 그러했다. 한유현은 박예림이 없는 제 세계는 훨씬 더 삭막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형에게 모든 무게를 다 짊어지게 만들어 파국을 일으켰으리라는 가정 역시도 당연하게 할 수 있었다. 한유현은 시원하게 식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제 품 안에서 곤히 잠든, 마찬가지로 생기가 넘치는 박예림의 뺨을 옅게 쓸었다. 한유현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였다. 아무리 담담하게 말해도 그 속내는 애원이나 다름없는 한 문장.
“나 두고 가지 마.”
“알아, 안다니까….”
갑자기 들려온 박예림의 목소리에 한유현은 깜짝 놀라 떨어지려던 심장을 겨우 붙잡았다. 뜨끔한 마음에 황급히 손을 떼고 박예림이 잠에서 깬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다. 박예림은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잠꼬대를 뭐 이렇게 심하게 해? 불평하면서도 한유현은 박예림이 무언가를 불편해하여 잠꼬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에 박예림 역시 뒤척이며 몸을 돌렸고, 휙 날아온 팔이 한유현의 가슴 위에 안착했다. 완벽하게 박예림에게 끌어안긴 모습이었다. 한유현이 내심 바랐던 것이고 동시에 가장 바라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얼굴이 가까웠다.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박예림은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홀리는 느낌이었다. 이래도 되나? 사귀기커녕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한유진의 유교력을 쏙 빼닮은 한유현은 잠시 갈등했으나, 이제 우물우물 입을 움직이는 박예림을 바라보자 잡생각은 모두 하늘 위로 날아가고 말았다. 저를 끌어안고 있는 어여쁜 존재는 이내 헤헤, 소리까지 내어 푸르게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한유현의 입꼬리 역시 슬금슬금 위를 향했을 때였다.
“나도 좋아해….”
심장이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천국의 하늘 끝까지 튀어 올라갔다. 머리에서는 종이 울렸다.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닌지 착각하고 싶었다. 뺨에 도는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원래의 박자감각 따위는 잊어버리고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심장에 한유현은 저도 모르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 옆에서 들렸다. 당장이라도 박예림을 깨워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듣고 싶었다. 네가 말한 그 ‘좋아해’가 내가 말하는 ‘좋아한다’의 의미와 같아? 너의 ‘좋아해’의 대상은 정말로 내가 맞아? 그러나 동시에, 한유현은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숨마저 죽이고 있었다.
한유현에게는 아직 용기가 없었다. 박예림이 입에 올린 ‘좋아함’의 대상이 자신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원래 불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장 괜찮으리라 여기는 순간이 아니라면 섣불리 눈을 떼어서는 안 되는, 언제 어디로 불티가 튀어나갈지 모르는, 사납고도 필수적이며 예측 불가한 것. 한유현은 불을 다루는 것처럼 박예림을 향하여 행동했다.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될 때에서나 붙잡을 용기를 낼 수 있는, 자그마한 불길함에도 몸서리치게 만드는. 한유현에게 있어 박예림은 그런 존재였다. 가장 한유현의 심장 가까이에 살고 있기에 그랬다. 좋아하는 것을 잃고 싶지 않을 때 한유현은 여느 때보다도 더 신중해지고는 했다. 그러니 한유현은 이번 역시도 기다리기로 했다. 제대로 결말이 나기 전까지는 무엇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제 사랑이 완전히 손 안에 떨어질 수만 있다면 한유현은 몇 년이고 웅크리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
심장 박동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제 품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만을 신경 쓰고 있던 한유현은 언제부터인지 기온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더위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