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선물
식혜 @Sickhey_Min
흐드러지게 핀 푸른 수국 다발을 테이블에 곱게 올려둔 유현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다리를 꼬고 잠시 앉아 있던 그는 얼마 못 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평소라면 주머니에 얌전히 넣어놨을 핸드폰을 손에 꾹 쥐고 있던 그는 핸드폰을 부수지 않으려고 힘을 약간 풀었다. 문득 고개를 틀어 유리창을 바라본 한유현은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푸른 계통의 반 팔 와이셔츠에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검은색 슬랙스, 그 밑으로는 잘 닦인 검은색 단화가 눈에 들어왔다. 제 나이대에 썩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한동안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던 유현은 손으로 셔츠 깃을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직접 골라 입은 옷이긴 했지만, 이런 차림이 영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어색함에도 이 차림을 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데이트할 때만이라도 평상복 좀 입어보라며 짜증을 바락바락 내던 박예림 때문이었다. 정작 박예림이 짜증을 낼 때는 가볍게 무시해버린 한유현이었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앞에서는 덤덤하게 반응하긴 했으나 오늘을 위해 며칠 전부터 무슨 옷을 입을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고른 옷이 지금의 이 어색한 차림이었다. 너무 가벼운 차림인가 했지만, 평소 박예림이 입고 다니는 옷을 생각하면 딱 이 정도가 옆에 있을 때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옷도 고민 끝에 골라 입고 박예림이 생각나는 푸른 수국까지 예쁘게 포장해왔건만, 정작 당사자가 아직까지 나타나질 않고 있으니 한유현도 이래저래 미칠 노릇이었다. 그냥 늦는 거라면 전화라도 해볼 텐데, 하필이면 던전에 들어간 상황이라 달리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박예림이 이번에 들어간 던전은 예림이 벌써 몇 번이나 들어가 봤던 던전이기도 했고, 예림에게 유리한 조건인 물이 지천에 널린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오늘 오전이라면 던전에 들어갔던 길드원들이 나오고도 남았어야 했었다. 하지만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아무런 소식 없이 잠잠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무렵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진동음이 한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한유현은 흥분한 목소리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나왔습니까?”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유현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런 한유현의 목소리를 들은 저 너머의 상대가 갑자기 까르르대며 웃었다.
“뭐야. 우리 길드장님,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
오 년을 익히 들어온 목소리가 들려오자 얼이 쑥 빠진 한유현이 한숨을 내쉬며 언성을 고르는가 싶더니 영 진정이 안 되는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왜 니가 전화를 해? 주변에 다른 사람 없어? 아니, 애초에 왜 이렇게 늦은 건데? 아직도 그렇게 실력이 없나, 박예림? S급 타이틀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과 질타에 입술을 삐죽이던 예림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야! 누군 니가 걱정했을까 봐 힘들게 던전 돌고 나오자마자 전화했더니 이게 진짜 한다는 소리 봐라!?”
커지는 음성에 핸드폰의 소리를 한껏 줄인 한유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현에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과장되게 내쉰 예림은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 됐어 한유현! 됐고! 창문 열어봐.”
“갑자기 창문은 왜?”
한유현이 묻기가 무섭게 창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낸 유현은 슬그머니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밀어 열었다. 창문이 약간 열리자 그 틈으로 손이 튀어 들어왔다. 창문을 덥석 잡은 그 손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녕, 한유현!”
열린 창문으로 박예림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그 얼굴에 눈살을 찌푸린 한유현은 손가락으로 예림의 이마를 꾹 눌렀다. 반사적으로 뒤로 밀리던 예림이 이마에 힘을 주더니 유현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오랜만에 보자마자 뭐 하는 거야!”
예림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한유현이 손가락을 내렸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지 여기까진 왜 왔어.”
창문턱에 걸터앉은 박예림은 뚱한 표정으로 유현에게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우리 길드장님이 날 너무 걱정해서 방에 불도 안 켜고 앉아 있지도 못할까 봐 여기까지 직접 왔다. 어쩔래?”
한유현은 일부러 톡 쏘는 어투로 밀어붙이듯 말한 박예림을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예림이 한 말 중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 없이 분한 듯이 씩씩대고만 있는 한유현을 훑어본 예림은 갑자기 깔깔대며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빵 터져버린 박예림을 보던 유현이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뭐가 웃긴데?”
한유현이 날카롭게 말하든 말든 자기가 웃을 만큼을 다 웃은 박예림은 손을 뻗어 유현의 셔츠 깃을 살짝 붙잡았다.
“내가 말한 거 신경 쓰느라 오늘은 이렇게 입고 와준 거야?”
그 말에 제 행색을 다시 한번 살펴본 유현은 그녀의 손을 쳐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평소처럼 입을 순 없잖아.”
유현이 쳐낸 손을 매만지던 예림은 그의 셔츠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근데 이렇게 입으니까 꼭 커플룩 맞춰 입은 것 같지 않냐?”
예림이 농담 반, 진심 반을 담아 한 말에 한유현은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봤다.
“쓸데없는 소리를.”
그 퉁명스러운 말에 혀를 쏙 내보인 예림은 가뿐히 날아올라 유현의 어깨를 타 넘고 방 안을 배회했다. 공중에서 방을 쭉 둘러보던 박예림의 눈에 테이블에 올라앉은 수국 다발이 들어왔다. 그 곁에 사뿐 내려선 예림은 꽃다발을 가리키며 유현을 돌아봤다.
“이거 뭐야? 선물이라도 받았어?”
방을 가로질러 박예림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한유현은 꽃다발을 덥석 쥐어 들더니 그녀의 앞에 꽃을 내밀었다. 제 앞에 들이밀어 진 수국을 보고도 예림이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한유현이 답답하는 양 말했다.
“내 선물이 아니라 니 선물이야. 내가 주는. 다녀오느라 고생했다고.”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예림은 유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품에 안아 든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예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웬일이냐? 천하의 한유현이 나 고생했다고 선물까지 친히 준비해놓고?”
박예림이 밝게 웃으며 한유현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예림의 손을 밀어낸 유현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받지 말든가.”
“어휴, 이거 말하는 거 봐라? 누가 마음에 안 든대? 고맙다는 거지.”
눈을 홉뜨고 한유현을 쳐다본 박예림이 그의 볼을 쭉 꼬집었다가 그가 손을 쳐내기 전에 잽싸게 손을 뗐다.
“이 불여우 진짜 성질 더러워서 나 말고 누가 데려가나 몰라.”
혀를 내두른 예림은 꽃다발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다시 창가로 향했다.
“말이나 못 하면. 내가 아니라 널 누가 데려가는지가 걱정이겠지.”
한유현이 박예림의 뒤를 따라 창가로 다가가자 예림은 창틀을 훌쩍 뛰어넘어 창문 밖 공중에 가볍게 떠올랐다. 예림은 한 손으로 수국을 끌어안은 채 반대쪽 손을 유현에게 내밀었다.
“선물 받았으니까 나도 줄게, 선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같이 데이트 가자.”
“던전 돌고 나왔으면 집 들어가서 쉴 것이지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한유현은 투덜거리는 어투로 반문했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박예림의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에 짧은 웃음을 내보인 예림은 한유현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유현이 제 곁에 떠오르자 박예림은 창문을 닫고는 유현을 데리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웬만한 빌딩보다 더 높은 하늘 위로 오른 박예림이 잡고 있던 손을 떼더니 한유현을 눈을 손으로 덮었다.
“뭐 하는 거야?”
한유현이 박예림의 손을 떼려는 듯 손목을 붙잡자 박예림이 팔에 힘을 꾹 주며 말했다.
“잠시 눈 감고 있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눈썹을 꿈틀거린 한유현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한숨으로 그를 대신하고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유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뗀 예림은 그의 눈앞에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아무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한 박예림은 한유현을 데리고 도시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았다.
한참을 날아서 이동하는 동안 한유현은 별다른 재촉 없이 예림이 자신을 부르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귓가를 스쳤고, 간간이 희미한 매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바람이 멈추고 다른 소리가 한유현의 귀를 감싸고 돌았다.
“이제 눈 떠도 돼.”
조용하던 박예림이 입을 열자 한유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딜 온 건데?”
“아래 한 번 봐봐.”
한유현의 짧은 물음에 박예림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아래로 굴린 한유현은 발밑의 상황을 확인하곤 박예림을 다시 바라봤다.
“갑자기 뭐야 이게.”
두 사람의 발밑에는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바다는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맞닿은 육지도 아득히 멀리로만 보였다.
“여름인데 둘 다 바빠서 바다 여행 한 번 못 와봤잖아? 이렇게나마 보고 가자 이거지. 여긴 둘밖에 없으니까 그런대로 나쁘지 않잖아?”
말을 끝맺고 방긋 웃은 예림은 선물 받은 수국을 곁에 띄운 채로 한유현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곤 아래로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잠시간 아래로 내려간 두 사람의 발이 찰랑거리는 바다 물결 위로 아슬아슬하게 떠 올랐다. 유현의 목덜미에 붙어있던 이린이 바닷물에 반응했는지 급하게 기어 올라가 제 주인의 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붉어진 한유현의 눈동자를 본 박예림이 깔깔대며 웃었다.
“야, 넌 나는 안 무서우면서 바다는 무서워?”
그녀의 말에 이린이 대신 유현이 입을 삐죽였다.
“니가 무섭기나 하겠냐. 너보단 내가 더 셀 텐데. 괜히 놀리지 마.”
“여기 바다 위거든? 여기서는 내가 길드장 너보다 한참 더 세다고.”
박예림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외치자 한유현은 침이 튄다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반응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예림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뭐, 됐고. 너무 어두우니까 불 좀 밝혀봐.”
예림이 발끝으로 수면을 통통 두드리며 말하자 유현이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박예림을 품에 폭 들어오도록 끌어안았다.
“화염 저항도 없으면서 큰소리는 잘 쳐.”
투덜대면서 할 말을 다 끝낸 한유현은 발밑에서부터 자잘한 불똥을 퍼뜨려 나갔다. 작은 불꽃이 수면에 비치며 더욱 환한 느낌을 냈다. 반짝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던 박예림이 한유현을 힘껏 안으며 웃었다.
“이 정도 불이면 아저씨도 못 해치겠는데 화염 저항이 왜 필요하냐? 안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지 그랬어.”
그 말에 한유현이 질색하며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혹시나 해서 그런 거지.”
유현의 말에 그 옆에 꼭 붙어 선 예림이 그를 안은 채로 등을 토닥여줬다.
“오구, 그랬어요? 그래서 옛날엔 나랑 같이 던전도 가고 그랬구나?”
“야, 조용히 안 해?”
한유현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예림은 보란 듯이 웃어버렸다. 찌푸린 얼굴로 예림이 웃는 걸 바라보던 유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머리에 기댔다. 눈을 굴려 유현의 표정을 살피던 예림은 그를 더 힘주어 안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던전 구석구석 살펴보느라 늦게 나온 거였어. 늦어서 걱정 많이 했어?”
대꾸 없이 잠시간 묵묵히 침묵을 이어가던 한유현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걱정하지 어떻게 안 하겠어. 안에서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들어가기 전에 늦을 거라고 말을 해주면 좋았잖아.”
한유현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따박따박 불만을 늘어놓자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박예림이 훌쩍 날아올라 유현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이구, 미안해.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니 애인이기 전에 이 세상의 S급인걸.”
박예림이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듯한 말을 별 대수롭지 않게 꺼내자 한유현이 저를 안고 있던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뒤로 돌아선 유현은 제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떠 있는 예림과 눈을 맞췄다.
“S급이기 이전에 우리 가족이잖아.”
그 말에 말문이 턱 막힌 박예림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유현의 눈을 피하다가 물 위에 내려섰다. 한유현을 슬쩍 올려다본 박예림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다음엔 제대로 말할게. 그럼 되지?”
눈치를 살피며 꺼낸 말에 한유현이 마치 져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의 표정이 한결 풀린 걸 확인한 예림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팔짱을 꼈다.
“올해 여름 지나기 전에 같이 제대로 바다 여행 가자.”
그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한유현은 벌려뒀던 불씨를 한 번에 거둬들였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지자 박예림이 의아한 얼굴로 한유현을 바라봤다.
“갑자기 불은 왜 꺼?”
고개를 숙이던 한유현은 그 말에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눈살을 대번 찌푸렸다.
“눈치가 없어?”
그 말에 알겠다는 양 까르르 웃은 박예림이 한유현에게 가까이 다가서 목에 팔을 둘렀다.
어두운 여름밤의 바다 위로 두 사람의 형체가 겹쳐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