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닌 여름의 눈치 게임
봄스 @boms_rpg
“더워 죽겠다, 길드장놈아!”
여름이었다. 더우냐 추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압도적으로 더운 계절이었다. 여름이 덥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상식일 것이다. 제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말이다. 물론 박예림이 생각하기에 한유현은 기본적인 상식이 종종 - 때로는 자주 -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 적이 있지만 여름이 덥다는 정도의 상식은 적어도 한유진이 가르쳤을 거로 생각했다. 한 나흘 전까지만 해도 설마 이 길드장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상식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박예림으로서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나흘이나 꾸준히 관찰한 끝에,
박예림은 오늘도 바짝 붙어있는 한유현을 향해 결국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연일 기록적인 더위가 갱신되고 있는 여름이었다. 농담 삼아 한국 전체에 불지옥 던전이라도 열린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가는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아무리 던전 부산물들을 이용한 최신 기술로 관리한다 해도 이런 더위에는 모두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라는 말은 당연히 한유진의 사육소에 있는 마수들을 포함하는 말이었다. 지쳐서 여름 동안에는 파업하겠습니다 해도 모두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날씨였지만 어디 한유진이 그런 사람이던가. 집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점차 퇴근이 뜸해지더니 요 며칠은 아예 사육소에서 살았다. 그러니 남겨진 둘이 집에 오붓하게 있는 시간 또한 길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박예림이 명예 한예림이 된 지도 오 년은 훌쩍 넘었고 한유현과 너나들이하며 이따금 드잡이질을 한 것도 거의 비슷했다. 아저씨처럼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반겨주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박예림의 인생에서 매일 조금씩 행복을 더하는 일이었다. 설령 그 대상이 한유현이라도. 비록 한유현이 어느 틈엔가 박예림의 마음속에 있어 슬쩍 선을 넘어버린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은 두 사람을 단단한 가족과 같은 인연으로 묶어주었으므로, 한유현과 보내는 시간은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좋았다. 누가 자기가 사둔 아이스크림 먹었느냐고, 그런 사소한 것으로 화내고 싸우고 그리고 화해할 수 있는 나날들이.
그렇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오늘도 한유현은 그 넓은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한유현이 먼저 그렇게 누워있었다면 박예림이 앉는 것을 포기하고 방에 틀어박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선후관계가 반대였다. 먼저 앉아서 TV를 보고 있던 쪽은 박예림이었다. 한유현은, 여느 때처럼 별 감흥 없이 거실을 지나치나 싶더니 털썩 옆자리에 앉았다. 그 점을 두고 박예림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TV마수농장은, 비록 바빠서 고정 출연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간에 한유진이 많이 얼굴을 비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즉 한유현이 챙겨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몇 안 되는 TV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박예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슬금슬금, 한유현의 머리가 박예림 쪽으로 기울어지기 전까지는.
이거 또 이러네.
박예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유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내버려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기울어진다 싶던 머리가 아예 툭 박예림의 어깨에 놓인다 싶더니 좀 더 지나자 아예 드러눕는 형태가 되었다. 개 무거워, 한유현. 그렇지만 박예림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다. 한유현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끈뜨끈한 열기를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때까지. 곱씹어보면 그, 한유현이 박예림을 지나치게 편하다고 여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신체적 접촉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있었고 이렇게 더워 죽을 정도로 들러붙은 것은 나흘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죽을 것이다. 더워 죽든지, 다른 이유로 죽든지. 그래서 박예림은 마수농장 스태프 롤이 올라가는 시점 즈음에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린 것이었다.
“박예림. 지금 우리 둘만 집에 있어.”
그리고, 박예림의 항의에 대한 대답이 저것이었다.
“뭐 그런 공포영화 같은 도입부가.”
더워서 죽으면 목격자 없이 시체 처리 하기 좋다는 뜻인가? 박예림은 진심으로 질색했다. 떨어지라고! 곱슬 거리는 머리를 거의 쥐어뜯을 정도가 되어서야 한유현은 느작느작, 생색내는 듯한 움직임으로 머리를 치웠다. 얼굴에 열이 오르지 않았나, 새삼 그런 것을 의식하며 박예림이 애써 TV로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따끔따끔 뺨에 시선이 와 닿았다. 박예림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한유현이 그렇게 입을 떼었다가 다물었다. 뭐. 박예림이 눈에 힘을 주고 그렇게 물으면 한유현은, 그 한유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쳤냐? 그런 말이 오늘 벌써 몇 번 목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한유현의 눈이 끝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박예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유현이었다. 그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쪽은 예림이였지만 갑자기 일어나 휙 등을 돌리는 모습에 놀란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박예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뭔데, 한유현! 라면 끓여줘? 하고 소리쳐 봤지만 등 뒤로 텅 문 닫히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열없는 TV의 광고 소리만 한참 동안 거실을 맴돌다가 픽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
한유현이 이상해 진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박예림은 그 날도 잊을 수 없다. 드물게 같이 던전을 돈 날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던전이었고 등급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저쯤이야 내가 한 시간이면 깨고 나오지. 박예림이 자신만만하게 던진 말에 한유현이 지지 않고 자기는 삼십 분이면 된다고 대답했다. 얼씨구? 그럼 나는 이 십오 분. 그런 유치한 말싸움이 오간 끝에 야기 된 결과야 뻔했다.
반칙하기 없기다. 그 말싸움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둘은 던전 입구가 마치 달리기 경주 출발선이라도 되는 양 서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임하자고 피스도 두고. 셋을 셈과 동시에 둘은 던전 입구를 달려서 지났다.
두 헌터가 진심으로 서로를 이겨 보려고 날뛰는 데에 버틸 수 있는 몬스터란 없었다. 수없이 타고 물에 휩쓸려 나가는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이 집중해서 보는 것은 오직 저쪽이 몇 마리의 몬스터를 쓰러뜨렸나 세는 일뿐이었다.
그런 일에 집중하다 보니 엄습한 위화감을 깨닫는 것도 늦었다. 시야 구석부터 아주 조금씩, 노이즈가 끼듯이 사물이 번져가고 있었다. 환각인가? 자신의 창끝에 와닿는 몬스터의 모습이 바니바니베어로 변했을 때야 박예림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쓰러뜨린 것 중에는 환각계 몬스터가 없었으니 아마 던전 보스의 영향일 것이다. 아이씨. 박예림은 짧게 혀를 찼다. 눈치를 챈 순간 주변의 풍경이 일렁이며 변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순식간에 박예림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찼다. 귀여운 바니바니베어 인형 시리즈, 학교 친구들, 현아 언니를 비롯한 브레이커 길드의 언니 동생들, 피스, 삐약이, 명우 오빠, 아저씨. 좋아하는 것들의 환각을 만들어 내 공격자의 움직임을 멈추는 환각계 몬스터는 몇 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등급조차 높지 않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울 힘이 없어 그런 식으로 본체를 감추는 겁쟁이였다.
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풍경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조금 기가 찬 듯 웃으며 박예림은 그것들을 가로질러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풍경 끝에 있는 한유현을 향해서.
“너 진짜 짜증 나.”
자꾸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지 말라고. 잘 지내고 있잖아. 몇 년 동안 계속 잘 오누이인 척 지내고 있으면 기특하다 하고 사람 마음을 알아줘야지, 눈치 없이 이런 환각 속에까지 꼭 나타나야겠냐고.
“진짜 싫어, 한유현.”
다음 순간 최대한으로 끌어모은 물의 마력이 환상들을 씻어 내렸다.
결국 그 날 승부의 행방은 묘연했다. 박예림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카운트할 수 없을 정도로 쓸려나간 던전과 축축해진 한유현 뿐이었으므로. 금방 증발시켜버리면 될 것을 굳이 축축하게 한참동안 서 있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그래도 박예림이 보기에 조금은 흡족했는지도 모른다. 대충 무승부로 치자. 그 날의 공략은 그렇게 끝났을진대, 던전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한유현은 어딘가 이상했다.
박예림은 눈치가 빠르다. 제아무리 한유현이 불여우라고 해도 박예림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 날 이후 명백히 한유현은 박예림을 피해 다녔다. 다른 길드원들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의 은근한 회피였다. 길드에서야 피차 일이 바쁘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집에 와서까지, 대놓고 피하면 한유진이 걱정할 테니 아주 은근하게. 절대로 단 한 순간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저 새끼가. 그럴 때마다 그런 날 것의 욕이 툭툭 올라와 억지로 음식과 함께 목으로 밀어 넣기 일쑤였다.
들어야 했다. 이대로 넘어가는 것은 박예림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저 꼴을 계속 보느니 화병으로 죽는 게 먼저다. 행동은 계획보다 빨랐다. 박예림은 한유현이 퇴근하는 팀을 노렸다. 아닌 달밤에 S급 헌터들의 추격전이 일어났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전력을 다한 추격전이었다. 물론 민가에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본인들끼리의 전력이었다 (그렇다고 경위서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송태원 실장은 딱딱한 표정으로 벌금 용지를 둘에게 주고 돌아갔다). 다행히 그 아슬아슬한 접전이 주변에 눈에 띌만한 피해를 주기 전에, 박예림은 겨우겨우 한유현의 발을 묶는 데 성공했다.
쾅. 손바닥 밑으로 으적 하고 담벼락이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한유현은 까만 눈으로 숨을 몰아쉬는 박예림을 내려다보았다. 한유현을 담벼락과 자신의 팔 안에 가둔 박예림은 한참 동안 정수리를 들썩이다가 겨우 잡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얘기 좀 하자니까, 길드장놈님아?”
“...해.”
박예림은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돌아온 말에 팍 인상을 구겼다. 말을 하라 시니까 하긴 하겠는데 그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선뜻 대답해 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간 불여우가, 하면서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삼키던 박예림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요즘 나 피하냐?”
그 물음에 대한 한유현의 대답은 ‘그냥’이었다.
박예림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그다음은 자신의 인내심의 관대함을 의심했다. 저 천하의 불여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남자한테서 그게 나올 말인가? 이게 진짜 끝을 보자는 건가? 궁금하면 일단 쓰러뜨려 놓고 물어보란 뜻인가? 슬슬 박예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무렵에 한유현과 눈이 다시 마주쳤다. 다시 마주친 까닭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데굴데굴 시선을 굴리다가 겨우 다시 박예림을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럴게.”
다행히 싸우자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처럼 한유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 순간 박예림은 머릿속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이걸 그냥 믿어 말어. 솔직히 퍽이나 그러겠느냐 싶으면서도 그 답을 듣는 순간 박예림은 푸시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라. 그렇게 순순히 대답하는 속내야 알 길이 없었지만 묻는다고 말할 것 같지도 않았고, 설마 길드장씩이나 된 놈이 허튼소리를 할 것 같지 않아 박예림은 쩌억 하고 담벼락에 파묻혔던 손을 꺼냈다. 붙들고 섰던 손을 탈탈 털며 돌아서 그럼 됐으니 가서 빨리 저녁이나 먹자고 하는 박예림의 등 뒤로,
“그걸로 끝이야?”
한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처럼 특별히 고저도 없어 감정을 알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박예림은 드물게 그 짧은 말이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보며 박예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한유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 한숨처럼 흐른 말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아무튼 그렇게 며칠의 어색한 내외가 끝나고 나니 이 꼬락서니였다. 피하지 말랬더니 들러붙는다. 피하지 말라고 했지 껌딱지가 되라고 말한 적은 없다. 지난 한 달간 백 번도 더 곱씹었지만 역시 없다. 왜 한유현 이 놈은 정도라는 걸 모르지? 인간의 사상이 왜 이리 극단적이지? 뭘 믿고 이렇게 노빠꾸 예스 직진 에잇톤 트럭이냔 말이다. 덥다는 핑계도 한 철이지, 여름이 지나면 그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가을이 되면 들러붙지 말라는 말에 한유현은 그답게 말간 얼굴로 왜? 하고 물음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물으면 박예림은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말해야 한다면 이 더위가 가시기 전에 해야 한다.
박예림은 손을 들어 한유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라면 먹어.”
굳이 노크하지 않아도 박예림이 올라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 없을 테지만, 그렇게 부를 때까지도 방 안은 조용했다. 세 개 끓였어. 혼자 다 못 먹어. 박예림은 그렇게 핑계를 댔다. 사실 뻔한 핑계였다. 둘이 있는데, 그것도 한유현은 방에 틀어박혔는데 라면을 세 개나 끓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것은 그냥 진실의 라면인 셈이다. 다행히 그 점을 한유현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뚱한 얼굴이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보였다. 그 표정에 박예림은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네 행동이 이상하다는 거지. 그렇게 네가 계속 이상하면 아저씨도 걱정하고.”
달각거리는 젓가락질 사이로 박예림은 그렇게 말했다. 면발을 삼키고 깨끗해진 젓가락을, 볼펜이나 지시봉이라도 되는 양 한유현의 눈 앞에서 흔들흔들하며 그렇게 말하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유현도 깔끔하게 면발을 들이키고 답했다.
“너는?”
“어? 나? 당연히 나도 걱정하지.”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걱정이 된다. 이 걱정에는 아마도 한유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한유현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지만, 아마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박예림은 고개를 왼쪽으로 천천히 기울이며 한유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계속되는 시선에도 눈을 피하는 대신, 박예림보다는 조금 느리게 눈 앞의 얼굴이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정말로 모를까? 이따금씩, 혹시나 하면서 품었던 생각들이 가만히 고개를 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 피하는 것도 싫고 다가가는 것도 싫다면.”
눈앞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자못 진지한 얼굴이다. 그게 뭐라고, 처음 겪어보는 일에 곤혹스러워하는 일곱 살 같은 표정이었다. 자기보다 언제나 오빠였던 사람에게서 발견하기에는 퍽이나 낯선 풍경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박예림에게는 썩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되려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그 곤란해 하는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은 괴롭히고 싶다거나,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거나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해연의 길드장님, 그 만인의 존경을 받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유현 안의 박예림을 조금 정도는 특별한 자리에 올려놓는 것 같아서.
“이야, 한유현씨. 언제는 제 눈치를 그렇게 보셨나요? 하고 싶은 대로하면 되지.”
그런 기분에 들떠 반 음 정도 높아진 목소리로 박예림이 말했다. 정말로? 그 말에 마찬가지로 들뜬 소리로 한유현 또한 대답했다. 그러다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는 듯 입이 다물어졌고, 여느 때처럼 돌아온 표정은 그러나 눈빛만은 제법 진지하게 박예림을 향하고 있었다. 박예림도 잠깐 입을 삐죽였다가 똑바로 그 얼굴을 마주했다. 잠깐의 정적에 에어컨이 울리는 소리와 그릇에 비뚤게 걸쳐져 있던 젓가락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끼어들었고, 서로의 눈빛이 더위와는 다른 어떤 온기를 머금는 순간에,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했더니 왜 분위기 잡아?”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박예림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적 없는데. 한유현의 볼멘소리는 박예림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웃는 얼굴로 눈을 피하며 박예림은 이번만큼은 진 것을 인정했다. 조금은 목께가 더웠다. 들러붙지 않아도 덥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한유현은.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 온기를 밀어내지 않은 쪽이 박예림이었고.
정말로 이대로 여름이 끝나면 어쩌나. 만일 여름이 끝나서 덥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면, 그래서 박예림이 비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한유현은 어떻게 하고 싶은걸까.
가을의 우리는 밀어내는 말 대신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박예림은 한유현을 조금 웃음이 사그러든, 그러나 여전히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보았고 대수롭지 않은 말을 이었다. 얼른 먹어, 라면 불겠다. 그런데 너 진짜, 그 때 던전에서 뭘 봤길래?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한유현은 대답 대신 라면을 들이키다가 콜록 하고 사레들리는 소리만 냈다. 별거 아니라는 마찬가지로 가벼운 대답과 특별히 추궁은 하지 않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그 날의 여름 또한 그렇게 흘러갔다.

